정극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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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년]](예종 15) 국자좨주·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임명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려 왕에게 신하들을 두루 만나 간언을 들을 것을 요청했다.<ref name=a/>
 
{{인용문2|신이 듣건대, 충성은 반드시 보답을 받으며 신의는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도 그러하였는데 지금이야말로 참으로 이 말을 받아들일만 합니다. 쌓은 땔감나무 아래에 불을 질러놓고질러 놓고 그 위에 자면서, 아직 불길이 다가오지 않았으니 안전하다고 말한다든지, 병을 뱃속에 기르면서 고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고질이 될 것인데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되어가는 형세를 생각해 보면 정말 통탄할 만합니다.
 
신이 『전한서 前漢書』를 살펴보니 ‘천하의 환란은 기초가 무너지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섭(陳涉)이 시골구석에서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소리치자 천하 사람들이 그를 따랐으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백성이 곤궁한데도 위에서는 구휼하지 않고, 아래에서 원망하는데도 위에서는 알지 못했으며, 풍속이 어지러워졌어도 정치가 이를 바로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진섭이 밑천으로 여긴 것으로 이것이 바로 기초가 무너진다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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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청연각(淸讌閣)에서 왕에게 『예기 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을 강론했고, [[1122년]](인종 즉위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ref name=b/>
 
같은 해 [[고려 인종|인종]](仁宗)이 즉위하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박승중]](朴昇中),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편수관(編修官)에 임명되어 『예종실록』의 편찬을 지시받았고.<ref>『고려사 인종세가』</ref>, 얼마 후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로보문각학사로 옮겼으나, [[한안인]](韓安仁)의 이종사촌동생이라는 이유로 [[이자겸]](李資謙)의 미움을 받아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패망한 후인 [[1127년]](인종 5) 소환되어 동경유수사(東京留守使)에 복직되었고, 얼마 후 판위위시사(判尉衛寺事)·한림학사(翰林學士)·지제고(知制誥)로 옮겼으나, 그 해에 61세로 졸했다.<ref nam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