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동: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정대남(토론)의 13585467판 편집을 되돌림
편집 요약 없음
27번째 줄:
 
한편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도읍터를 물색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남경]] 일대를 조사할 때 [[하륜]]이 무악 남쪽을 적극 찬성하였지만, 일부에서는 명당이 너무 좁다고 반대하므로 [[1394년]] 태조 3년에 왕이 직접 [[무학대사]]를 데리고 와서 조사를 하였다. 이 때 무학대사가 무악재 고개 마루턱에 올라 도성쪽을 한동안 살폈으므로 ‘무학현’(無學峴)이라고 하였다. [[1769년]] 영조 45년에 영조는 부왕인 [[조선 숙종|숙종]]의 [[명릉 (조선)|명릉]] 역사를 시작하고, 몸소 이 고개에 올라서서 명릉 쪽을 바라보며 이 고개를 ‘추모현’이라 명명하였다. 어쨌거나 고개 하나에 여러개의 이름이 붙어있는 무악재는 매우 험한 고개였으므로 온갖 짐승들이 서식했었고 이에 따른 호환도 자주 있었다. 나라에서는 북쪽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무악재를 낮추는 공사를 여러차례 한 끝에 수척이 깎여지게 되었다. 영천까지 전차가 가설되면서 무악재를 또다시 확장, 낮추는 공사를 하였으며 [[1960년대]]의 공사로 거의 지금과 같은 위치로 낮아지게 되었다. 현재의 무악동은 의주로를 경계로 하여 서쪽의 서대문구 현저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은 행촌동, 동쪽은 누상동, 사직동과 접하고 있으며 북쪽은 서대문구 홍제동과 누상동이 산 3번지를 정점으로 하여 각각 경계를 달리하고 있다.<ref>[http://www.jongno.go.kr/Dong.do?menuId=8289&menuNo=8289&dong=06 무악동 동명유래], 2012년 8월 26일 확인</ref>
 
== 교통 ==
* [[독립문역]]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