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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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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제목=히로히토
그날 정오에 [[쇼와
[[파일:Prison Release of Korean activists.JPG|thumb|260px|[[8월 16일]] 오전 9시 [[마포형무소]]앞<ref>8월 15일 서대문 형무소로 알려졌으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한편, 가운데 검은색 바지 입은 인물 뒤에 이마만 보이는 인물이 당시 22살의 나이로 마포형무소에서 수감한 이갑상</ref>]]
물론 그날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으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고, 히로히토
=== 8월 16일 ===
다음날이 되자 비로소 조항 내용대로 [[서대문 형무소|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했다. 그 때서야 [[경성부|경성]](서울)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히로히토
{{인용문2|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에 원등([[엔도 류사쿠]])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에게 잘못 됐던가는 다시 말하고 싶지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지도하여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다섯 가지 조건을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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