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신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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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신군의 식객 가운데 이원(李園)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여동생이 몹시 아름다웠다. 이원은 언젠가 그녀를 고열왕에게 바쳐 출세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춘신군 또한 그 여동생을 몹시 총애하였는데, 이후 그녀는 춘신군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이에 이원은 고열왕에게 자식이 없음을<ref>다만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따르면 「초군(楚君, 고열왕)에게는 자식이 없었다고 하지만 유왕 말고도 아들(초의 마지막 왕이었던 부추負芻 등)이 있었으니 이는 틀린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ref> 들어 춘신군에게 「내 누이동생을 왕에게 바치고, 뱃속의 아이를 왕의 아들로서 다음 왕으로 세운다면 초는 당신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춘신군은 이 책을 깊이 받아들여 고열왕에게 이원의 여동생을 바치게 되었고, 그녀가 왕후(王后)가 되면서 이원도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뒤 이원은 일이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춘신군의 목숨을 노리게 되었고, 위기를 느낀 춘신군의 식객 주영(朱英)이 「내게 이원을 죽이라 명해주십시오」라고 말했으나, 춘신군은 이원을 가볍게 보아 듣지 않았다. 주영은 신변 위협을 느끼고 그대로 도망쳐 버린다.
 
[[기원전 238년]], 고열왕은 병사하고, 장례식에 가던 춘신군은 자문(棘門)에서 매복하고 있던 이원의 자객에게 종자와 함께 살해되어 그 목이 성밖에성 밖에 버려졌고, 일족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이원의 여동생이 낳은 춘신군의 아들은 훗날 즉위하여 유왕(幽王)이 되었다.<ref>춘신군과 유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여불위]](呂不韋)와 [[시황제]](始皇帝)가 있고, 이 두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보는 역사가도 있다.</ref> 유왕은 재위 10년째인 [[기원전 228년]]에 죽고, 유왕의 친동생인 애왕(哀王)이 뒤를 이었으나 재위 두 달만에 이복 형인 부추(負芻)의 습격으로 살해된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