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연평해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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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 ==
=== 정부 대응 비판 ===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이 ▦북방한계선을 지키고 ▦선제공격을 하지말것 ▦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것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것 으로 이루어진 4대 교전수칙을 지시하여 해군이 ‘밀어내기’로 불리는 차단기동 개념을 도입했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143587 [해군] 교전규칙 어떻게 변해왔나], 《한국일보》, 2002.7.1</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138603 〔사설]안보구멍 왜 뚫렸나], 《[[동아일보]]》, 2002.7.2</ref> 이후 제2연평해전에서 국군 피해가 컸던 것은 김대중대통령의 교전지침, 차단기동 도입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648681&cp=nv [한석동 칼럼] 서해교전 영웅들은 어디 있는가], 《[[쿠키뉴스]]》, 2010.4.27</ref> 하지만 그 이전에도 [경고방송->차단기동->경고사격->위협사격->격파사격] 5단계로 합참의 해상 작전지침이 존재했으며 제1연평해전 에서도 똑같은 교전지침과 차단기동을 사용하였다.<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69126 교전규칙 변경 전·후], 《중앙일보》, 2009.11.11</ref> 당시 [[이준 (1940년)|이준]] 국방장관은 "김대통령이 99년 연평해전 기간에 4대 지침을 내렸지만, 이는 97년 작성된 합참 작전예규에 이미 포함돼 있었으며 교전규칙의 기본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지, 햇볕정책 때문에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은 아니다"고 답변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209966 정치.통일분야 정부측 답변], 《연합뉴스》, 2002.7.22</ref><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4020&cid=43667&categoryId=43667 합동참모본부 서해상 교전수칙]</ref>
 
하지만 그 이전에도 [경고방송->차단기동->경고사격->위협사격->격파사격] 5단계로 합참의 해상 작전지침이 존재했으며 제1연평해전 에서도 똑같은 교전지침과 차단기동을 사용했지만 대승을 거둔 바 있다.<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69126 교전규칙 변경 전·후], 《중앙일보》, 2009.11.11</ref> 당시 [[이준 (1940년)|이준]] 국방장관은 "김대통령이 99년 연평해전 기간에 4대 지침을 내렸지만, 이는 97년 작성된 합참 작전예규에 이미 포함돼 있었으며 교전규칙의 기본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지, 햇볕정책 때문에 추가되거나 수정된 것은 아니다"고 답변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209966 정치.통일분야 정부측 답변], 《연합뉴스》, 2002.7.22</ref><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4020&cid=43667&categoryId=43667 합동참모본부 서해상 교전수칙]</ref> 이와 관련하여 교전수칙이나 차단기동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당시 참수리호가 전투대형을 갖추지 않은 채로, 6노트라는 굉장히 느린 속도로 북한 경비정에서 불과 150m밖에 안 떨어진 지점까지 가서 차단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는 주장도 있다.<ref>[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01557.html‘연평해전’이 건너뛴 세가지 진실]</ref>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여는 등의 늦장 대응을 했다.<ref>[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08/2010040800168.html "침몰원인, 어떤 경우든 단호히 대응"], 《[[조선일보]]》, 2010.4.8</ref> 군통수권자인 김대중대통령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62801073137026001 제2연평해전 10년… 貶毁(폄훼)의 역사 바로잡아야], 《문화일보》, 2012.6.28</ref>
 
[[이회창]]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는 의원총회에서 “정부는 서해도발이 우발적이라고 하면서 미국 일본에 냉정한 대응을 요청했다는데 도대체 어느 나라 정부인가”라고 주장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138808 “정부, 北 우발적 도발로 몰고 있다” 한나라 축소의혹 제기]</ref> [[황장엽]]은 [[북한이탈주민|탈북자동지회]]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려, “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2071070026 |제목=<nowiki> [황장엽] “총 한방 쏘는데도 김정일 재가 필요”</nowiki> |출판사=[[조선일보사]] |작성일자 =2002-07-10 |확인일자=2009-06-22}}</ref> [[서울대학교|서울법대]] 교수 [[조국]]은 [[오연호]]와 공저한 책《진보집권플랜》에서 [[연평해전]]과 관련, "서쪽에서는 해전이 벌어지고,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주장했다.<ref><진보집권플랜> 오연호, 조국 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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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 시|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으며,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5&aid=0000109362 韓―日정상 “교전 냉정대응”,김대통령―고이즈미 회담]</ref> 한편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당시 김대중의 태도에 분노했다. 고(故) [[박동혁 (1981년)|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 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서울공항|성남 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밖에 있다가도 들어와야 합니다. 그게 정상적인 국가예요.”라고 김대중을 비판하였다.<ref>[http://news.donga.com/3/all/20100529/28689931/1 제복이 존경받는 사회<6·끝>윤영하 소령 아버지의 소원], 《동아일보》, 2010.5.29</ref>
 
교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ref>[http://news.donga.com/3/all/20130703/56259083/1 <전문기자 칼럼/윤상호>피와 죽음으로 지킨 NLL], 《동아일보》, 2013.7.3</ref> 이에 대해 국방부는 "군 장례식은 장례위원장 이하만 참석하는것이 관례다." , 총리실은 "참석 요청이 없었을뿐만 아니라 의전을 고려해 불참했다."라고 해명하였지만해명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0220354 서해교전 희생장병 영결식, 총리·軍수뇌부 불참 '비난'], 《매일경제》이후 제2연평해전 전사자 추모식에도 김대중은 참석하지 않았고</ref>[http://news.donga.com/3/all/20120621/47175059/1 [제2연평해전 10주년]“대한민국은 10년간 잊고 살았다, 나라 지킨 희생을…”] 2004년 노무현 정권 때 제2연평해전, 동티모르 파병 이후 법률 시행령이 개정되어 지금과 같은 보상 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 참여정부는 군인연금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적과의 교전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간부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였다. 이 덕을 후에 천안한 피격 사태 순직자들이 받게 되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1주기를 앞둔 2003년 6월 25일에 유가족들과 국가유공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고 이어서 2003년 6월 27일 2함대를 방문하여 안보공원에 전시된 참수리357호정을 방문하여 묵념하고 헌화하는 등 추모하고 이후 참수리357호정에서 다리를 잃었지만 복귀한 이희완 중위에게 위로전화, 그 외에도 명절마다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냈다.<ref>[https://namu.wiki/w/%EC%A0%9C2%EC%97%B0%ED%8F%89%ED%95%B4%EC%A0%84]</ref>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DJ)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오직 햇볕정책에만 매달렸다고 비판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 때문에 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0416320]</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