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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의령군|의령]] 출생이다. 어릴 때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동래군]]과 고향 의령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면서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09년]] [[윤세복]], [[서상일]],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듬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1차 망명한 뒤 독립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안희제는그러나 이후 독립 운동을 위해서는 자금자금을 모집이모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생각한 그는 귀국한 후 [[1914년]] 부산에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의 전신)설립한 뒤설립하여 실업가로서 독립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1919년]] [[3·1 운동]] 때는발생 이후 의령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백산상회|백산무역주식회사]]를 통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했다. 장학회이외에도 장학회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설립했으며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기도 힜으며, [[1925년]] [[중외일보]]를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1930년대 들어 가산을 정리해 만주 지역으로 재차 망명한 뒤 옛 [[발해]] 지역에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였다. [[대종교]]망명 교인이었던 그는 대동청년단 시절부터의 동지인 윤세복이 교주로 있는 대종교를[[대종교]]에 1931년 입교하고, 중심으로민족 독립정신의 운동을창달에 벌였다힘썼다.
 
[[1942년]] [[11월]] [[일본 제국|일제]]가 윤세복 등 대종교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한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체포되었고,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몇시간 뒤에 사망했다. 이 당시 [[헤이룽장 성]] [[액하감옥]]에서의 일제의 고문은 혹심하였던가혹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이로 인해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21명 중 10명이 살아나오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때 사망한 열명의 대종교인을 가리키는 대종교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향인 의령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부산에는 [[백산기념관]]이 세워져 있다.<ref>부산광역시 중구청, [http://www.bsjunggu.go.kr/pages_H/H000690.asp 백산기념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