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설 (1551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1,227 바이트 제거됨 ,  5년 전
편집 요약 없음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합천]] 군수로 임명되었으나 [[지례 전투]]에서 겁을 먹고 도망가는 적병을 추격하지 않아 벌을 받았다. 그러나 [[1594년]] 경상우수사 [[원균]]이 다대포 사건으로 인해 탄핵당해 [[충청도]]로 내려간 후 경상우수영을 이어 받았다.
 
그 뒤 [[1597년]] [[칠천량 해전]] 당시 전투 중 상황이 불리해지자 전선 12척과 병사 120명을 수습하여 후퇴하고 이후 [[이순신]]과 합류하여 [[이순신]]에게 자신이 수습한 전선과 병사들을 내주었다.
(1595년) 선산부사로 임명되어 금오산성과 천생산성을 수축하고 선산부사겸 금오산별장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명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탈영했으며 이에 도원수 [[권율]]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체포하려 했으나 계속 잡히지 않다가 [[1598년]]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전란이 끝난 뒤에야 [[선산군|선산]] 땅에서 체포되어 참수형당했다
(1597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다대포 앞바다에서 왜선 8척을 전소시켰다.
 
그 뒤 [[1597년]] [[칠천량 해전]] 당시 전투 중 상황이 불리해지자 전선 8척과 병사 120명을 수습하여 후퇴하여 무수히 따르는 왜선들에 앞서 한산도에 도착하여 군량과 무기들을 전함으로 옮겨 싣고 군영을 불태워 적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청야작전을 실행 하고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 시켰다.
 
이후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전함 4척을 더 수습하였고(현무공실기 참조) [명량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휴가를 받았다가 이틀후 도망쳤다(난중일기 참조)고 알려져 있으나 난중일기 정유편을 보면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내용은 두번 기록되어 있으며 처음 기록한 내용과 두번째 기록한 내용이 서로 달라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다
 
선조실록 1598년 12월 26일자를 보면 전쟁이 끝나고 병조판서 홍여순의 "배설이 충청도에서 무뢰배를 모으고 있다"는 내용으로 탄핵하여 1599년 3월 6일 참수 되었다.
 
그러나 1599년 3월 6일자 선조실록에서는 배설은 1597년 칠천량전투의 패전책임을 물어 참수되었다고 기록하고, 배설의 부친 裵德文의 이름을 裵德龍으로 아들 裵尙龍을 裵尙忠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 사후 ==
전후평가로는 군으로서 충실하게 전쟁터에서 종군한 인물이었고 전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에 추증되고 사면 복권되었다.
1599년 참수된후 6년후인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1등에 추증되었고 1610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가증되었고 다시 1873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가증되었다.
 
== 배설을 연기한 배우들 ==
== 각주 ==
{{각주}}
선조실록 정유년 7월 22일자 두번째 기사
난중일기 정유년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현무공실기
선조실록 1599년 3월 6일자
승정원 일기
 
{{토막글|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