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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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확대되던 시위는 [[4월 19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이 총궐기하고 수많은 중고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한 시위와 이에 대한 경찰의 유혈 진압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사태는 동료들의 희생에 분노한 학생들이 집회를 여는 지경에 이르렀고, 계엄령은 서울과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나 군부는 무력진압을 사실상 거부하고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나기 대사는 3.15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다.
 
{{인용문2|In my younger days I certainly knew my people well and even now felt myself certainly one of them. <br />(내가 젊었을때에는 우리국민들을 잘 알고 이해해 왔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이승만의 대답)}}
 
한편 학생들을 탄압하자는 측근자들의 제의를 받자 그는 서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민중이 내가 그만둘 것을 원한다면 물러서면 된다.'<ref name="ReferenceB">이원순, 《인간 이승만: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신태양사, 1988) 381페이지</ref>'며 강경 대응론에는 반대하였다.
 
==== 대통령직 사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