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Kim Taeeun (토론 | 기여)
→‎생애: 성장과정과 주요작품
32번째 줄:
 
== 생애 ==
1749년 8월 2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에서 태어났다. 왕실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웠고, 그리스 로마의 고전 문학과 성경 등을 읽었다. [[북독일]]계 아버지로부터는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를, [[남독일]]계의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신년시를 써서 조부모에게 선물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 라이프치히 대학 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67년에 첫 희곡 ‘연인의 변덕’을 썼다. 1770년 슈트라스부르크( 스트라스부르 ) 대학 재학 당시 호메로스 , 오시안 , 셰익스피어 의 위대함에 눈을 떴으며, ‘ 질풍노도 운동 (Sturm und Drang)’의 계기를 마련했다. 법률 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있던 중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때의 체험을 소설로 옮긴 것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이다. 1775년 바이마르 로 이주하여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정가로 국정에 참여해 다양한 성과를 거두었고, 식물학, 해부학, 광물학, 지질학, 색채론 등 인간을 설명하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다.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관을 확립했고, 1794년 실러를 만나 함께 독일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꽃피웠다. 1796년에는 대표적인 교양소설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를 썼다. 1805년 실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지지만 이후에도 창작 활동과 연구는 끊임이 없었고, [ 색채론 ](1810), [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1821), [ 이탈리아 기행 』(1829) 등을 완성했다. 스물네 살에 구상하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기 바로 한 해 전에 완성한 역작 [ 파우스트 ]를 마지막으로 1832년 세상을 떠났다.
왕실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독일]]계 아버지로부터는 '체격과 근면한 생활 태도'를, [[남독일]]계의 어머니로부터는 [[예술]]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짓는 흥미'를 이어받았다.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았으며, [[7년 전쟁]] 중 그의 고향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 [[연극|극]]과 [[회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레트헨과의 사랑([[1763년]]-[[1764년]])이 깨어진 후 16세 때 입학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1765년]]-[[1768년]]), 안나카타리나 쇤코프와 연애를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나 희곡을 발표하였는데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가 그것이다. 분방한 생활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려서 천재교육을 받았으며, [[7년 전쟁]] 중 그의 고향이 [[프랑스군]]에게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 [[연극|극]]과 [[회화]]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레트헨과의 사랑([[1763년]]-[[1764년]])이 깨어진 후 16세 때 입학한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1765년]]-[[1768년]]), 안나카타리나 쇤코프와 연애를 하였고, 이 체험을 통해 [[로코코]]풍의 [[시]]나 희곡을 발표하였는데 목가조의 희극 <애인의 변덕>, <공범자>가 그것이다. 분방한 생활로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하여 요양 중([[1768년]]-[[1770년]]), [[:de:Susanne von Klettenberg|수산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와의 교제를 통하여, 경건한 종교감정을 키웠으며, 또한 [[신비과학]]이나 [[연금술]]에 흥미를 기울였다. 회복 후, [[1770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법률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러던 중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헤르더]]와 상봉해, [[문학]]의 본질에 눈뜨고 [[성서]], [[민요]], [[호메로스]], [[윌리엄 셰익스피어|셰익스피어]] 등에 친숙해졌다. 그의 영향으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랑스 [[고전주의]] 미학에의 반발이 심해졌다.
 
[[:fr:Sessenheim|제센하임]]의 목사의 딸인 [[:de:Friederike Brion|프리데리케 브리온]]을 사랑하여 민요풍의 청신소박한 서정시를 지었고, 대승원의 건물을 보고 [[고딕 건축]]의 진가를 터득하기도 하였다. 귀향후 [[변호사]]를 개업([[1771년]])하였으나, 관심은 오히려 문학에 쏠려 《[[괴츠 폰 베를린힝겐]]》([[1773년]])의 초고를 정리하고 [[:de:Darmstädter Kreis|다름슈타트]]의 [[:de:Johann Heinrich Merck|요한 메르크]](1741-1791)와 친교를 맺었다. [[1772년]] 법률실습을 위해 [[베츨라어]] 고등법원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de:Charlotte Buff|샤를로테 부프]](1753-1828)를 알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슈투름 운트 드랑]]기의 대표작인 희곡 《[[괴츠 폰 베를린힝겐]]》 및 비극 《[[:de:Clavigo|클라비고]]》, 비극 《[[:de:Stella (Goethe)|슈텔라]]》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여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