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아이 히로미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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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
=== 프로 입단 전 ===
[[아키타 현]] [[미나미아키타 군]]에서 태어나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100여 편의 영화를 감상할 정도의 영화광이었으며 특히 ‘[[마이 페어 레이디]]’를 일곱 차례나 보면서 극중 노래의 가사(영어)를 기억했을 정도였다. 1969년에 아키타 현립 아키타 공업고등학교에 진학, 야구부에서 활약하고 있었지만 야구를 하는 시간보다 영화관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선배에 의한 불합리한 언행에 참기 힘들어 야구부를 퇴단했지만 투구와 타석 모두 오치아이와 똑같은 실력을 가진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경기가 가까워지면서 부원들에게 설득한 끝에 다시 야구부에 복귀했다.<ref>오치아이는 고교 시절에 야구부 퇴단과 복귀를 7차례 반복하고 있었다.</ref> 오치아이는 거의 연습을 하지 않고, 4번 타자로서 경기에 출전했다.
 
고교 졸업 후 1972년 [[도요 대학]]에 진학했지만 선배가 담배를 손에 넣으면 후배가 재빠르게 불을 붙이는 행동과 같은 체육계 내부에서의 관행에 납득하지 못했고 부상과 부진으로 순탄찮은 시련을 겪으면서 반 년만에 야구부를 퇴단함과 동시에 대학도 중퇴하는 등 자신의 고향인 아키타로 돌아갔다.
 
그 후 [[볼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여 볼링에 눈을 뜨게했는데 프로 테스트 응시를 앞두고 속도 위반으로 적발돼 범칙금을 내는 등 수험료를 지불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응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치아이의 재능을 아까워할 정도로 느낀 고교 시절 은사의 권유도 있어 1974년 [[후추 시 (도쿄 도)|후추 시]]에 소재하고 있는 [[도시바|도쿄 시바우라 전기]]공장에 기간제 직원으로 입사, 공장 내에 있는 사회인 야구팀 [[:ja:東芝硬式野球部|도시바 후추]]에 입단했다. 사회인 야구팀에서의 5년 동안 정규 경기에서 약 70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맹활약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1978년 아마추어 야구 전일본 대표 선수로 발탁([[모리 시게카즈]]도 발탁됨)되었다.
 
같은 해인 197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지바 롯데 마린스|롯데 오리온스]]로부터 3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하여 오치아이를 영입한 [[조노우치 구니오]]의 말에 의하면, “변화구에 강하고 상대 투수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타입의 타자” 라는 이유를 들었다(조노우치는 투수로서 보는 시점에서 오치아이의 자질을 간파하고 있었다). 참고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오치아이를 드래프트 2순위로 지명할 예정이었지만 [[에가와 사건]]으로 인해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면서 오치아이의 지명은 실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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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
주니치 입단 첫 해인 1987년에는 2년 연속 3관왕을 차지한 선수로서 [[센트럴 리그]] 경기에 데뷔했지만 홈런과 타점 모두 과거 2년과는 다르게 급격히 떨어지면서 단 한 개의 타이틀도 없이 무관으로 그쳤다. 특히 [[시노즈카 가즈노리|시노즈카 도시오]], [[쇼다 고조]] 등과 수위타자 경쟁을 펼쳤지만 선두와의 2리 차로 리그 3위인 타율 3할 3푼 1리를 기록했다. 시즌 도중인 8월 20일에는 장남이 탄생했다.
 
이듬해 1988년에는 시즌 32홈런과 95타점(모두 리그 2위), 그리고 승리 타점 19를 기록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규정 타석을 채운 이후에는 타율 3할 대를 처음으로 밑돌았다. 1989년 시즌 종반에는 파죽지세로 116타점을 기록해 센트럴 리그 팀에 이적한 이후 처음으로 타이틀이 되는 타점왕을 차지하면서 양대 리그에서 타점왕을 차지한 것은 사상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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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 2005년 ====
[[파일:Konami Cup Asia Series Champions Chunichi Dragons No,2.jpg|thumb|250px|2007년 11월 11일, [[도쿄 돔]]에서 열린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 결승전에서 우승이 확정된 후 오치아이 감독(가운데)이 선수들로부터 우승 헹가레를 받고 있는 모습]]
감독 부임 1년째인 2004년에는 3년간 1군에서의 등판 기회가 없었던 [[가와사키 겐지로]]를 개막전 선발 투수로 기용했고 가와사키는 5실점을 기록하면서 경기 도중에 강판당했지만 팀은 역전승을 거뒀다. 팀의 에이스인 [[가와카미 겐신]]을 3차전에 선발로 등판시켜 3연패의 위험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가와사키의 개막전 기용으로 팀에게 자극을 주면서도 선발 투수에 관한 정보 누설이 없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을 두어 그 후에 말하고 있다. 취임 1년 만에 팀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2004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먼저 3승을 기록하면서도 3승 4패라는 성적을 기록해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2005년, [[타이론 우즈]]의 구타 사건에 의한 출장 정지와 [[센트럴·퍼시픽 교류전|교류전]]에 있어서의 신통치 않은 팀 성적으로 결국 시즌 2위로 마감했다.
 
==== 2006년 ====
이듬해에는 감독으로서 통산 두 번째의 리그 우승을 2년 만에 달성했고 [[2006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1승 4패의 성적으로 또 다시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시즌 종료 후 구단과의 재계약 협상에서는 2년 계약을 맺었다.
 
==== 200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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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
감독 취임 5년째인 2008년 시즌에서는 순위와 승수, 승률이 모두 최저 성적을 기록하면서 감독으로서의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후쿠도메 고스케]]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이적이나 [[2008년 하계 올림픽|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된 5명의 주력 선수들이 전력에서 제외된 것의 영향으로 인하여 결국 3위로 끝났다. [[2008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클라이맥스 시리즈]]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요미우리한테 단 1승만 거두면서 일본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고 이후 구단과의 재계약 과정에서는 3년 계약을 맺었다.
 
==== 20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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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
1월 14일에는 2011년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자로 선정, 그 해의 정규 시즌에는 주력 타자들의 잇단 타격 부진으로 전반기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8월 상순에는 5위로 떨어지는 등 선두 야쿠르트와의 최대 10경기 차이가 났지만 9월에 들어가면서 투수진의 활약에 의해 승차를 줄여 나갔다. 9월 22일에 구단으로부터 2011년 시즌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히면서 그 영향으로 인해 10월 6일에는 팀은 리그 선두 자리를 차지했다.
 
10월 18일에는 142경기째에 리그 우승을 제패해(감독으로서는 통산 4번째의 리그 우승) 구단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 리그 연패를 달성했다. 야쿠르트와의 [[2011년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도 4승 2패(리그 우승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를 기록하여 2년 연속(감독으로서는 5번째)의 [[2011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 진출을 이끌어 경기 종료 후에는 당초 예정되지 않았던 선수와 코칭 스태프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다. 그러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3승 4패를 기록하여 작년과 마찬가지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쳤기 때문에 이것이 주니치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007년부터 센트럴 리그에도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도입되었지만 소극적인 의견을 내세워 ‘완전 제패’(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를 목표로 내걸고 있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결국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11월 20일부로 주니치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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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치아이 전기 - 일본 제일의 터프하고 상냥한 지휘관의 독창적 ‘지휘봉&인심 장악술’》(다이아몬드사, 2004년 11월) ISBN 4-478-96091-7
 
== 주석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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