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미네 가나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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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역 시절 ===
1951년, 전년도에 [[쇼치쿠 로빈스]]에게 리그 우승을 빼앗겨 전력 강화를 서두르고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웃을 받아 시즌 중에 입단했고<ref name="nfljapan"/> 일본에서의 첫 타석에서 [[스기시타 시게루]]를 상대로 세이프티 번트를 시도했다. 1이닝 3도루(일본 기록<ref name="nfljapan"/>)나 병살을 피하기 위한 홈에서의 크로스 플레이 등으로 본고장의 주루 기술을 발휘하여<ref>[http://www.nikkansports.com/baseball/news/p-bb-tp0-20110302-743006.html {{lang|ja|「ウォーリー」与那嶺氏死去 走塁に革命}}] - 닛칸 스포츠, 2011년 3월 2일</ref> 규정 타수(현재의 규정 타석)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타율은 3할을 기록했다.
 
이듬해 1952년부터 1960년까지 8년 연속으로 규정 타석에 도달했으며 [[일본 프로 야구 수위 타자|수위 타자]] 3회,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최고 수훈 선수(MVP)]] 1회, [[일본 프로 야구 베스트 나인|베스트 나인]] 7회 수상 등의 활약으로 제2기 요미우리 황금 시대를 지원했다. 1번 요나미네·2번 [[지바 시게루 (야구인)|지바 시게루]]는 당시 야구계 굴지의 테이블 세터였으며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그의 라이벌이었다. 또한 1956년에는 구단 사상 첫 개막전 선두 타자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요미우리에서 기록한 선수는 2003년의 [[시미즈 다카유키]]와 2007년의 [[다카하시 요시노부 (야구 선수)|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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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미국에 귀국했고 1998년에 하와이 고등학교 체육 협회에 20만 달러를 기부했다.<ref>슈칸 베이스볼, 2011년 3월 21일호, p.95</ref> 이후 고향인 하와이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2006년 [[일본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18년 만에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2009년에는 [[오릭스 버펄로스]]의 초청으로 7월 16일의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시구식을 하는 등 80세가 넘어서도 건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전립선암]]으로 2011년 2월 28일에 하와이 주 [[호놀룰루]]의 시니어 홈에서 사망했다. 향년 85세<ref>{{lang|ja|与那嶺要氏死去、85歳=元巨人外野手、中日監督-プロ野球}} - 지지 통신, 2011년 3월 1일</ref>.
 
사망한지 약 3개월 뒤인 2011년 5월 27일, [[도쿄 도]] [[미나토 구]] [[롯폰기]]에 있는 롯폰기 교회(생전에 요나미네가 다니던 곳)에서 ‘작별의 회’가 개최되어 [[나가시마 시게오]]와 [[오 사다하루]], 주니치 감독 시절의 제자로 1974년 우승 당시의 투수였던 [[호시노 센이치]] 등 400명이 참석하여 고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오 사다하루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 야구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 요나미네의 가입은 프로 야구 발전의 이정표 중 하나였다”<ref>[http://www.sponichi.co.jp/baseball/news/2011/05/27/kiji/K20110527000903870.html {{lang|ja|万雷の拍手で与那嶺氏と別れ…星野監督「良いチームつくります」}}]- 스포츠 닛폰, 2011년 5월 27일</ref> 라고 연설했다. 또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인 호시노는 “월리는 살아 있습니다. 제가 ‘월리이즘’으로 라쿠텐을 만들고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지반을 쌓아 월리에게 보고하고 싶습니다”<ref>[http://www.nikkansports.com/baseball/news/p-bb-tp0-20110528-782149.html {{lang|ja|星野監督「ウォーリーイズム」で虎狩りだ}}] - 닛칸 스포츠, 2011년 5월 28일</ref> 라고 인사하며 박수 갈채와 환호성을 받았다. 사실 작별 모임은 당초 3월 22일에 [[지요다 구]] [[고지마치]]의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연기되었다.
 
==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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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는 일상 회화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읽고 쓰기는 거의 못했고 섬세한 표현에 서투른 부분도 있었다. 그가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한 것은 야구 연습에 전념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 시간을 줄이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주니치 감독 시절에 원정 당시 한 선수가 야간 통행 금지를 어기고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곤도 다다유키]]의 《프로 야구 감독 열전》에는 패전 투수가 되었던 선수에게 했던 말로 나와 있는데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음). 요나미네는 “오늘 밤은 자지 말고 반성해라!”라고 꾸짖어야 하는 것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고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을 수차례 반복하다가 결국 말하지 못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버린 적이 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왜 감독이 인사를 간 것일까”라고 의아해 했다([[마쓰모토 유키쓰라]]의 후일담). 그러나 본인은 아무런 대책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문을 읽고 전해달라고 하며 스포츠 신문 기자들의 생각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야구에 대한 자세는 확고했지만 일상에서는 매우 느긋했으며 가정에서는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야자와 겐이치]]는 요나미네의 감독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회상했다.
 
{{인용문|
개막전이나 이동일에 모두를 집에 초대해 주었고 요나미네 부인의 요리를 대접해 주었고 아드님과 따님이 환대해 주었다. 그렇게 팀의 화합이 이루어져 갔다. 일본의 감독에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타입이었다.}}
 
요나미네 감독 시절의 에이스였던 [[호시노 센이치]]는 “요나미네는 얀챠 스님의 사용법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미국의 합리주의와 일본의 나니와부시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선수를 조종하며 팀을 정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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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왜 일본의 선수들은 사인을 해주지 않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오 사다하루였는지 아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큰 아이가 공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사인을 해주고 있지 않아 내가 해준 것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연히도 요나미네와 오 사다하루는 1994년에 동시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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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 요미우리 신문사 저 《자이언츠 5000승의 기억》(베이스볼 매거진사, 2007년), p.&nbsp;24 ~ 인물 소개. ISBN 978-4-583-10029-6
 
== 주석각주 ==
<refere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