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성씨):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6번째 줄:
 
; 한국
'''위'''(魏)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8,675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77위이다. 본관은 장흥, 관산, 고흥, 전주, 함흥 등 9본이 있으며, 대종은 '''[[장흥 위씨|장흥]]'''이다(長興) 단본이다.
 
* '''[[장흥 위씨]]'''(長興 魏氏) 시조 '''위경'''(魏鏡)은 중국 관서 홍농 사람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당 태종]]에게 도예지사를 청하자 보내준 [[당나라]]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다. 경(鏡)이라는 이름은 960년 [[후당]] 황제가 지어 주었다고 한다. 위경(魏鏡)은 10세기 [[오대십국]] 때 [[후당]]에서 사신으로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아랑상서 시중에 이르렀으며 회주군(현재의 [[전라남도]] [[장흥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하였다. 그러나이후 선계가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초 대각간시중(大角干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세계를 이어왔다. 위창주의 아들 '''[[위계정]]'''(魏繼廷)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보궐지제고(左補闕知制誥)를 거쳐 선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고, 숙종 초에 예부와 이부의 상서가 되어서도 결백하고 지조있는 관료생활을 계속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어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를 거쳐 1101년(숙종 6)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1104년 문하시랑평장사 겸 태자소사(門下侍郎平章事兼太子少師), 이듬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53 인물|LST_168_532_0292|장흥『고려사』 위씨}}권95, 열전8]</ref> 장흥 위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3명, 무과 급제자 18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68_532_0292|장흥 위씨}}</ref> 주요 인물로는 조선 선조 때 수군절도사 [[위대기]](魏大器), 영조 때 [[좌부승지]] [[위창조]](魏昌祖), 고원군수(高原郡守) [[위흥조]](魏興祖) 등이 있다.
 
== 가죽 위 韋 ==
16번째 줄:
 
; 한국
'''위'''(韋)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821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157위이다. 본관은 '''[[강화 위씨|강화]]'''(江華) 단본이다.
 
* '''[[강화 위씨]]'''(江華 韋氏) 시조 '''[[위수여]]'''(韋壽餘)는 중원(中原) 출신으로 960년([[고려 광종]] 11) [[고려]]에 동래(東來)하여 사선관(司膳官)이 되었고, [[고려 목종]](穆宗)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고려 현종]](顯宗) 초에는 치사(致仕)를 상소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 받은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으로 강화백(江華伯)에 봉해졌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23 인물|LST_167_025_0355|강화『고려사』 위씨}}권94, 열전7]</ref> 고려시대 인물로는 [[1225년]]([[고려 고종]](高宗) 12년)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를 역임한 [[위원]](韋元)<ref>『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ref>,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을 역임한 [[위득유]](韋得柔, ? ~ 1278년)가 있다. 조선시대 인물로는 [[1679년]]([[조선 숙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察訪), [[성균관]] 전적을 역임한 [[위수징]](韋壽徵)이 있다.<ref>『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67_025_0355|강화 위씨}}</ref> 현대 인물로는 골프 선수 [[위창수]]가 있다.
 
== 지킬 위 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