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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쟁탈==
 
===후삼국의 정립===
이들 중 견훤과 궁예는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새로운 정권을 수립, 건국하여 신라와 정립(鼎立)하게 되었다. 이를 후삼국(後三國)이라 한다.
이때 비로소 견훤은 백제왕을 칭하였고, 연호를 정개(政開)라고 정하였으며, 자신이 세운 나라의 제도와 관직을 정비하였으며, 중국 강남의 오월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맺었다. 견훤의 발언에서 당시 신라가 백제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백제인들에게 신라는 정통성 있는 지배자가 아니라 정복자였고, 따라서 백제를 재건하고 신라를 쳐 없애 분을 풀어야만 한다는 방식의 사고가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백제]]라 칭하였으나 삼국시대와 구분지어 후백제라 불린다.
 
견훤이 나라를 세우자 901년 궁예는 [[효공왕]] 때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하였다. 그리고 917년 사벌주(현 [[상주시]] 일대)에서도 [[박언창]]이 [[후사벌]]을 건국하였다.
[[파일:후삼국.jpg|thumb|right|250px|신라, 후백제, 태봉과 [[후사벌]]('''[[박언창]]''', '''917년-929년''', 노랑색]]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세력확장===
왕건 덕에 승승 장구하는 궁예는 [[903년]]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철원(鐵圓)과 부양(斧壤)에 이르러 산수를 두루 살펴보았다. [[904년]]에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는데,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였다. (제정한 관직 이름은 비록 신라의 제도에 따랐으나 다른 것도 있었다.) 나라 이름을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 원년(元年)이라 하였다. 패강도(浿江道)의 10여 주현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905년]] 7월에 궁예가 드디어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8월에는 궁예가 군사를 움직여 신라의 변방 고을을 침략하고 약탈하며 죽령(竹嶺) 동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신라 조정은 땅이 날로 줄어드는 것을 듣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어, 여러 성주(城主)들에게 명하여 나가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후백제 -고려 전쟁===
[[File:Battle of Mt.Kongsan.jpg|thumb|right|250px|[[공산 전투]]에서<br>(공산성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우측에 선 이)과 [[고려 태조]] [[왕건]](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
궁예는 강력한 왕권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이 강한 왕권을 지향하던 궁예의 말에 순순히 따를리 만무했다. 궁예는 고구려계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청주 호족들을 이용하는 등 여러 왕권 강화정책을 펴가고, 왕권에 조금이라도 도전할 낌새가 보이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 때문에 신하들의 반발이 심했고, 결국 그를 따르던 장군들마저 배반해 나라를 잃고 말았다. 궁예는 도망다니다가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 역사를 쓴 사람은 왕건이 세운 고려의 사람들이고, 또한 왕건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것은 진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궁예의 궁궐이 있던 철원 근방에는 명성산(궁예가 왕건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키웠으나, 끝내 역부족인 것을 깨닫고 군대를 해산하자 부하들이 슬피 울었다. 그것을 따 명성산이라 한다. 울음산이라고도 한다.)등 궁예가 끝까지 저항하다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궁예는 그렇게 축출되었고, 궁예의 뒤를 이어 북방의 왕조로 추대된 것은 [[왕건]](王建)이었다. 왕건은 즉위와 함께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송악에 천도하니, 이것이 뒷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다.
 
 
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는 공산(현재 대구)과 고창(현 안동)의 큰 두번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공산은 왕건의 대패, 고창은 견훤의 대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후로도 둘은 비슷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백제는 내부 균열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ref >{{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의 성립/고려의 통일#고려의 통일〔槪說〕|고려의 통일〔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태조 왕건은 일시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의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는 교전(交戰) 상태를 지속하였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호족들이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와 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外交戰) 양상을 전개한 고려와 후백제의 균형은 고창(古昌, 安東)에서의 전투를 계기로 고려측의 승리로 기울게 되었다. }}</ref>
 
=== 연표 ===
 
 
* 892년 : 견훤의 반란, 광주 점령. 궁예, 양길의 반군에 가담하다.
* 900년 : 후백제가 공식적으로 건국
* 901년 :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다. 5년 후 다시 마진으로 국호를 바꾸고 [[궁예도성]](강원도 철원군으로철원군)으로 수도를 옮겼다.
* 911년 : 마진에서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다.
* 917년 : 신라 경명왕의 5남 박언창이 후사벌을 건국하다.
* 918년 : 왕건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를 세운 후, 연호를 천수라고 한다.
* 926년 : 거란이 발해를 침략. 발해 태자 대광현이 부하 30여 명을 데리고 고려 태조에게 귀순.
* 928년 : 견훤이 신라를 침공해 경주를 함락시킨다. 신라 경애왕을 견훤이 사살한다.
* 929년 : 견훤이 후사벌을 공격해 멸망시킨다.
* 930년 : 고창 전투 - 왕건이 견훤에게 신라 경애왕을 죽인 것을 비난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 934년 : 홍성 전투 - 후백제의 국력을 손상시킨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는 8000명의 군사를 잃는다.
* 935년 : 견훤이 [[금강 (후백제)|금강]](막내)을 후계자로 선정한다. 신라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다.
* 936년 3월 : 견훤이 아내 고비녀와 박영규를 데리고 고려로 망명한다.
* 936년 8월 : 견훤과 왕건이 공동으로 지휘했던 황산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킨다. 쿠데타의 주범인 능환과 양검을 처벌하고, 드디어 후삼국 통일을 이룬다.
 
== 함께 보기 ==
* [[궁예도성]]
* [[남북국 시대]]
* [[후삼국 시대 인물 목록|후삼국 시대의 인물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