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남 (195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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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남'''(金勇男, [[1958년]] [[2월 26일]] ~ )은 전 [[한국KBO 프로 야구리그]]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였다.
고 [[최동원]], 현 롯데 자이언츠 감독(2013) [[김시진]]과 더불어 1970년대 중반 고교야구 투수 3인방으로 불리었다.당시 한국인 선수로는 보기 드물게 포크볼을 구사할 줄 알았고 안정된 제구력과 당시로서는 빠른 140대의 구속까지 끌어올릴 줄 알았다. 전북 군산에서 출생한 김용남은 군산초등학교와 군산중학교 야구부를 거쳐 군산상고 야구부로 출전하여 대통령배, 전국체전 고등부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군산 상고 야구부에서 함께 운동하던 선수로는 김성한을 비롯하여 해태 타이거즈 첫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이던 김종윤, 그리고 김현용, 최병춘, 주장 안재홍 등이 있었다. 특히 1976년 대통령배 고교 야구 결승전에서는 김시진이 이끌던 대구상고와 대결하여 김용남, 김시진 모두 9회말까지 완투했고 2안타를 허용한 김시진에게 9안타를 허용한 김용남이 오히려 완봉승을 거두며 1:0으로 이겨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김시진의 볼은 낮으나 구질이 가벼웠다고 평가됐으며, 김용남의 볼은 높으나 묵직했는데, 김시진이 허용한 2안타 중 한 개가 뼈아픈 3루타가 됐던 게 결정적이었다. 김용남은 김시진, 최동원과 더불어 고교 야구에 보기드물게 한 해에 배출된 초고교급 투수의 반열에 올랐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겨울 캠프에 초청받아 최동원, 김시진 등과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대구상고 출신의 김시진, 이만수와 함께 한양대학교 진학, 그후 한국화장품 야구단을 거치며 아마추어 야구의 주요 스타로 활약했다. 특히 한국화장품 소속 시절 실업야구 선수권대회에서는 팀의 우승을 주도하며 최우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프로 입단 후 1982년 프로야구 올스타전 서군 선발투수로 베스트 10에 뽑히기도 했으며 특히 당시 4할 타자였던 백인천에게 20타석 넘게 연속 범타와 삼진을 유도하여 화제가 됐었다. 1983년에는 해타 타이거즈의 첫 우승을 견인했는데 당시 해태는 김용남, 이상윤, 주동식의 투수 3인방이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1983년 한국 시리즈에서 2차전에 선발 투수 주동식에 이어 등판해서 승리 투수가 됐고 4차전에서는 15회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1:1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선발과 불펜을 넘나드는 활동을 해태에서 이어가던 중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하여 1988년까지 선수로 뛰었다. 프로 선수 은퇴 후 빙그레 이글스 코치,쌍방울 레이더스 코치와 군상상고 감독, 신일고 코치 등을 역임하며 후배 양성에도 힘썼는데 95년 시즌 후 쌍방울을 떠난 뒤 프로야구계와 인연을 끊었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 투수로 활약 중인 [[차우찬]]은 김용남 감독이 군산 상고 감독 시절 키워낸 선수다. 지금은 야구계를 떠나 골프유통업계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