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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문종]] 때에는 [[최충]](崔沖)의 9재학당(九齋學堂) 이후 12공도라는 사학이 번창해지면서 관학을 압도하였다. 특히 12공도는 매년 여름이면 승방(僧房)을 빌어서 유학강습을 하였으며, 유교가 교육기관으로서 불교의 사원을 이용한 것이다.
 
[[고려 예종|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국학’으로 개칭하고, 전문적인 7재(七齋)와 양현고(養賢庫)라는 육영재단을 두고 교육을 강조하였다. 특히 7재는 경전을 강습하는 곳이었는데, 과거준비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배가시켰으며, 도서관 겸 학문연구소인 청연각·보문각(寶文閣) 등을 두어 교육에 대한 국가의 관심도를 높였다. 그 후 [[고려 충렬왕|충렬왕]] 때에 [[안향]](安珦)의 건의로 ‘국학’이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되었고, 섬학전(贍學錢)과 경사교수도감(經史敎授都監)을 두어 관학을 혁신·부활시켰다. 이때를 전후하여 [[주자학]]이 들어와 성균관은 관리양성의 전문기관으로서, 또 학문연구의 전당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점차 학문연구에 중점을 두면서 조선시대의 성균관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