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트마어 크라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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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국기나라|바이마르 공화국}} [[도르트문트]]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2015|9|18|1925|4|4}}
|사망지= {{국기나라|독일}} [[바이에른 주]] 라이트 임 빈클
|키=
|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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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1982-83 시즌 이전까지 [[독일]] 밖을 돌아다녔다. 그는 [[1982년]]에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계약을 하였다. 레버쿠젠에서 그는 팀을 2번째 해에 리그 순위를 9위 안으로 올렸다. 이후 그는 더 나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3시즌만에 해임되었다.
 
그는 이후에 다시 [[푸스볼-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에서 감독직을 맡지 않았으며, 크라머는 다양한 해외의 클럽과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 중, [[1991년]]부터 [[1992년]]까지는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U-23 국가대표팀]]을 맡아 28년만의 올림픽 본선 자력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국내 축구계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정작 [[1992년 하계 올림픽]] 본선을 치르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떠나야 했다. [[2002년]], 크라머는 축구계에서 공식으로 은퇴하였고, [[2005년]]에는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 사생활 ==
크라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낙하산 부대 [[대위]]로 참여하였다. 그는 현재 두번 결혼하였으며, [[바이에른 주]]의 라이트 임 빈클에서 죽을 때까지 그의 가족과 거주하고 있다.
 
그는 국제적 업적을 달성하며, 크라머는 2차례 명예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독일 명예의 십자가 (Bundesverdienstkreuz) 와 일본 명예의 훈장을 수여받았다. 더 나아가서, 크라머는 [[아메리카 토착민|미국 원주민]]의 [[수족]]과 [[모히칸]]족의 명예 추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