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르케고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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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 {{사망일과 나이|1855|11|11|1813|5|5}}
|사망지 = [[덴마크]], [[코펜하겐]]
|학파 = [[대륙 철학]],<ref>이 분류는 시대착오적이다. 키르케고르는 예외적이고 유일무이한 사상가이었고 자신의 글을 어떤 특정한 철학적 학파나 전통에 맞추어 쓴 적이 없으며, 자신을 어떤 학파에 속한다고 규정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은 20세기와 21세기에 발달한 여러 학파들의 선구적인 작업으로 간주된다. 본 문서의 "영향과 평판" 항목을 참조하라.</ref><ref name="CambComp">헤이네이해네이, 알라스테이어앨러스터, 고든 마리노(Hannay, Alastair, Gordon Marino), "키르케고르의 케임브리지 친구"(''The Cambridge Companion to Kierkegaar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ISBN 0-521-47719-0</ref> [[덴마크 회화의 황금 시대|덴마크 미술의 황금시대]]에 영향을 줌, [[실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후기구조주의]], [[실존주의 심리학]], [[신정통주의]], 그리고 많은 학파의 선구자
|연구분야 = [[종교]], [[형이상학]], [[인식론]], [[미학]], [[윤리학]], [[심리학]]
|주요업적 =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간주됨, 불안, 신앙의 도약
|영향받음 = [[아브라함]]([[구약성서]]의 [[창세기]]), [[쇼펜하우어]] [[아리스토텔레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헤겔]], [[이마누엘 칸트|칸트]], [[마르틴 루터|루터]], [[소크라테스]]<ref>소크라테스의 영향은 키르케고르가 쓴 "죽음에 이르는 병"과 "사랑의 작업"에 나타난다.</ref> ([[플라톤]], [[크세노폰]], [[아리스토파네스]]의 글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접했음)
|영향줌 = 키르케고르 이후의 신학자, 작가, 철학자 중에서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 [[칼 바르트|바르트]], [[디트리히 본회퍼|본회퍼]], [[에밀 브루너|브루너]], [[마르틴 부버|부버]], [[알베르 카뮈|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드 보부아르]], [[자크 데리다|데리다]], [[빅토르 프랭클|프랭클]], [[마르틴 하이데거|하이데거]], [[헤르만 헤세|헤세]], [[헨리크 입센|입센]], [[카를 야스퍼스|야스퍼스]], [[프란츠 카프카|카프카]], [[가브리엘 마르셀|마르셀]], [[라이너 마리아 릴케|릴케]], [[장 폴 사르트르|사르트르]], [[폴 틸리히|틸리히]], [[미겔 데 우나무노|우나무노]], [[한스 우르스 폰 발터사르발타자르|우르스 폰 발터사르발타자르]], [[루드비히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비트겐슈타인]]
|서명 = Kierkegaard_sig.png
|상자너비 =
}}
'''쇠얀쇠렌 오뷔에 키에르케고어키르케고르'''({{llang|da|Søren Aabye Kierkegaard}}, {{IPA-all|ˈsœːɔn ˈkʰiɔ̯ɡ̊əˌɡ̊ɔːˀˈkʰiɔ̯g̊əˌg̊ɔːˀ}}, {{소리|DA-Søren Kierkegaard.ogg}} [[1813년]] [[5월 5일]]~[[1855년]] [[11월 11일]])는 19세기 [[덴마크]]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키르케고르는 사실상 [[실존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쇼펜하우어]]를 매우 만나고 싶어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쇼펜하우어]]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관념론]]과 당시 덴마크 [[루터교회]]의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반대하였다. 그의 작품 중 많은 수가 [[신앙]]의 본질, [[기독교]] 교회의 제도, 기독교 윤리와 [[신학]], 그리고 삶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개인이 직면하게 되는 [[감정]]과 [[감각]] 같은 종교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키르케고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에 속하는 [[사르트르]]나 [[니체]]와 달리 ‘기독교 실존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다양한 [[필명]]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이름들은 복잡한 대화에서 그들 각자가 지니는 특유의 관점을 드러낸다. 그는 많은 작품을 익명으로 남겼으며, 그가 익명으로 쓴 작품을 비판하는 또 다른 익명의 작품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키르케고르는 독자에게 의미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그것은 “과제란 어려워야만 하고, 오직 어려움만이 고상한 마음에 영감을 불어넣기” 때문이다.<ref>쇠렌 키에르케고르, 《일기와 메모》(''Journals and Papers''), 인디아나 대학 출판부, ISBN 0-253-18239-5.</ref> 그 뒤에 어떤 사람들은 키르케고르가 [[실존주의자]], [[신정통주의자]], 휴머니즘적인 심리학을 한 [[인본주의자]], [[개인주의자]] 등등이었다고 해석한다. 키르케고르는 [[철학]]과 [[신학]], [[심리학]] 그리고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현대 사상에서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ref>윌리엄 후벤(William Hubben). 《도스토옙스키, 키에르케고르, 니체, 카프카: 우리 운명의 네 예언자》, New York: Collier Books, 1962.</ref><ref>립피트, 존과 다니엘 후토(Lippitt, John and Daniel Hutto), “비논리의 논리(Making Sense of Nonsense): 키르케고르와 비트겐슈타인(Kierkegaard and Wittgenstein)”, 허트포대쉬어하트퍼드셔 대학(University of Hertfordshire)[http://web.archive.org/web/20070515035439/http://www.herts.ac.uk/philosophy/Aris_Soc.html], 수정일시: 11월 4일, 2007.</ref><ref>찰스 크리겐(Creegan, Charles), “비트겐슈타인과 키르케고르”(Wittgenstein and Kierkegaard)[http://home.clear.net.nz/pages/ccreegan/wk/chapter1.html], 러틀리지, 2006년 4월 23일 수정됨.</ref>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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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친의 영향 ====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는 우울했고, 걱정이 많았으며, 종교심이 깊었고,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다. 미카엘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살다간 나이인 33세를 넘기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어린 시절 유틀란 황야에서 심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나머지 하느님을 저주했던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혼외정사로 아내를 [[임신]]시킨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일곱 자녀 중 상당수가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자녀 중 두 명이 33세를 넘어서 생존했을 때 그의 믿음은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그 나이를 넘긴 두 사람은, 쇠렌과 쇠렌의 몇 살 위의 형인 [[페테르 크리스티안 키르케고르|페테르 크리스티안]](Peter Christian Kierkegaard)이었다. 페테르는 [[신학자]]로 정부에서도 활동했으며, [[루터교]] 주교를 지냈다.
 
아버지는 [[예수|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아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했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미카엘은 막내아들 쇠렌에게 엄격한 개신교 교육을 베풀었다.<ref name="지만지0162">[[지식을 만드는 지식]], [http://zmanz.blogi.kr/entry/0162 결혼에 관한 약간의 성찰: 반론에 대한 응답, 유부남 씀 Adskilligt om Ægteskabet mod Indsigelser. Af en Ægtemand ]{{깨진 링크}}</ref> 아버지는 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곤 했으며, 아들이 신학교를 나와 개신교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ref name="지만지0162"/> 쇠렌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따랐고, 아버지의 암울한 성격, 신앙심, 그리고 가르침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ref name="지만지0162"/> 쇠렌의 암울한 성격과 어떻게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평생의 문제의식은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다.<ref name="지만지0162"/> 그가 나중에 저술한 위대한 작품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이러한 유산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f name="지만지0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