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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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고구려의 역대 국왕|고구려의 26대 국왕]]
}}
'''영양태왕영양왕'''(嬰陽王, ?~[[618년]])은 [[고구려]]의 제26대 [[국왕|왕]](재위 : [[590년]]~[[618년]])으로 일명 '''평양왕'''(平陽王), '''대흥왕'''(大興王
)이다. [[휘]]는 원(元) 또는 대원(大元)으로 [[고구려 평원왕|평원왕]]의 맏아들이다. [[수 문제]]와 [[수 양제]]가 각각 30만 대군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오자, [[을지문덕]]을 보내어 살수(지금의 [[청천강]]으로 추정)에서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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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백제]]와의 전쟁 ===
이 소식을 접한 영양태왕은영양왕은 진노하여 곧바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침공했다. 백제에 대한 공격은 곧 [[신라]]에 대한 공격을 예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일은 곧 한동안 중단되었던 고구려의 백제 및 신라에 대한 공략이 재개되었음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백제와 신라는 즉시 전시 체제로 돌입하였다. 영양왕이 백제와 신라에 대하여 압박을 가한 일은 중국 대륙의 침입에 앞서 [[한반도]] 쪽 변방을 먼저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600년]](영양태왕영양왕 11년)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유기 (역사서)|유기]](留記)》 1백 권을 재편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했다.
 
[[603년]] 영양왕은 장군 [[고승 (고구려)|고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신라에서는 [[신라 진평왕|진평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에 대항하였고, 이 때문에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역시 함락시키지 못했고, 간신히 석두성을 공격하여 포로 3천 명을 사로잡아 끌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