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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단군조선은 국가의 시조로서 중요시되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지배자인 단군과 기자는 국조(國祖)로서 제사를 지냈으며 단군조선은 조선의 역사가 중국에 못지 않게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문자 기록이 미비했던 시기의 고대 국가였던 탓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나마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로 인해 중국 은·주에서 도래한 [[기자]]가 시조로 선호되면서 사대부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편찬된 많은 역사서들은 대부분 단군조선부터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기자조선 또는 [[삼국 시대|삼국]]을 기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의 기록에 부기(附記)되거나 별도의 기록으로 다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에 불과하고 역사성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적 연구가 병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사학을 주창하며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초가 되는 국가로 강조하였다. 또한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등을 모두 단군조선의 후계 국가 또는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ref>김헌, 《배달족 역사》, 1922 등</ref>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으로부터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이라는 왕조는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2개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때로 본다. 한편 단군에 대해서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촌락 또는 부족 국가의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ref>송호정, 〈KBS방영 “비밀의 왕국 고조선”을 비판한다〉, 《역사비평》2000년 겨울호, 2000년</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국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을 랴오닝 성 중심으로 비정하였다.<ref>리지린, 《고조선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3년</ref>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단군릉]]을 발굴하는 등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였다.<ref>장우진, 〈대동강유역은 인류의 발상지이며 조선사람의 발원지〉, 《조선고고연구》 1호, 1999년</ref>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입장 변화를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ref>이기동, 〈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한국사 시민강좌》27집, 2000년</ref>
 
200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최근 2~3년 사이 정선, 춘천 등에서 청동기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되어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고조선 건국시기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거의 일치하여 청동기 시대도 연대를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2007년 2월 23일에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부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좀더 명시적인 표현으로 수정할 것을 담은 서술 지침을 발표하였다.
 
== 문헌 기록 ==
{{인용문|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태조 1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8월 11일(경신) 2번째기사}}
 
 
{{인용문|예조 판서 심수(沈鏽)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묘(三聖廟)의 위판(位版)의 흙으로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었으니, 마땅히 개조(改造)해야 합니다.”하니, 임금이 부제학 서명응(徐命膺)을 불러 삼성(三聖)의 고적(故蹟)을 물으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삼성은 곧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이며, 역사에서 말하는 바 아사달산(阿斯達山)은 곧 지금의 구월산입니다.”하고, 그 고사(故事)를 심히 상세하게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환웅은 곧 단군의 아버지이고, 환인은 곧 단군의 할아버지이다.”하였다.|《조선왕조실록》영조 106권, 41년(1765 을유 / 청 건륭(乾隆) 30년) 12월 8일(기유) 1번째기사}}
 
그러나 문자 기록이 미비했던 시기의 고대 국가였던 탓에 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은 매우 소략하고 정확한 연대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나마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대주의로 인해 중국 은·주에서 도래한 [[기자]]가 시조로 선호되면서 사대부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편찬된 많은 역사서들은 대부분 단군조선부터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기자조선 또는 [[삼국 시대|삼국]]을 기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기자조선의 기록에 부기(附記)되거나 별도의 기록으로 다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단군조선은 고조선과 함께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역사적 실체를 부정당하였다. 일제는 단군조선과 단군신화가 신화에 불과하고 역사성이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식민사관]]의 일환인 ‘타율성론’에 입각하여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식민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에 대한 문헌적 연구가 병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박은식]], [[신채호]] 등은 민족사학을 주창하며 단군조선을 민족의 시초가 되는 국가로 강조하였다. 또한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 몽골 등을 모두 단군조선의 후계 국가 또는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ref>김헌, 《배달족 역사》, 1922 등</ref>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단군신화 및 단군조선으로부터 고조선의 역사와 사회상을 분석하고 있다. 기자조선과 함께 단군조선이라는 왕조는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2개 시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연대에 있어서도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단군조선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23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던 때로 본다. 한편 단군에 대해서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촌락 또는 부족 국가의 정치·종교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ref>송호정, 〈KBS방영 “비밀의 왕국 고조선”을 비판한다〉, 《역사비평》2000년 겨울호, 2000년</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역사학계는 1990년대 이전까지 사회주의 역사학에 입각하여 단군조선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국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을 랴오닝 성 중심으로 비정하였다.<ref>리지린, 《고조선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963년</ref>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입장을 바꿔 [[단군릉]]을 발굴하는 등 단군신화를 역사적 실체로 이해하고 평양 일대를 고조선의 중심지로 강조하였다.<ref>장우진, 〈대동강유역은 인류의 발상지이며 조선사람의 발원지〉, 《조선고고연구》 1호, 1999년</ref>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북한의 이러한 입장 변화를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ref>이기동, 〈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한국사 시민강좌》27집, 2000년</ref>
 
2000년대 이후의 대한민국에서도 최근 2~3년 사이 정선, 춘천 등에서 청동기 초기 유물로 보이는 덧띠새김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쯤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발굴되어 청동기 문화를 가졌다는 고조선 건국시기와 청동기 도입 시기가 거의 일치하여 청동기 시대도 연대를 올려야 한다는 학계의 지적에 따라, 2007년 2월 23일에 대한민국 교육인적자원부는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는 부분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좀더 명시적인 표현으로 수정할 것을 담은 서술 지침을 발표하였다.
 
== 문헌 기록 ==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에는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서기 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檀君朝鮮《東國通鑑·外紀(동국통감·외기)》〈徐居正·崔溥 等 共撰(서거정·최부 등 공찬)〉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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