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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 중국 [[제요]])의 무진년(戊辰年)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중략)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朴略)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이르러서 은(殷)나라의 태사(太師: [[기자]])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조선왕조실록》태종 31권, 16년(1416 병신 / 명 영락(永樂) 14년) 6월 1일(신유) 2번째기사}}
 
{{인용문|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사눌(柳思訥)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역대세년가|세년가]](世年歌)를 보건대,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중략)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白岳)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九月山) 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구월산)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평양)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재결(裁決)하시옵소서.”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였다.|《조선왕조실록》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2월 26일(정해) 4번째기사}}
 
{{인용문|예조(禮曹)에서 황해도(黃海道) 삼성사(三聖祠)에 있는 단군(檀君)의 축문(祝文)을 평양(平壤) 단군사(檀君祠)의 예(例)에 의거하여 ‘전조선(前朝鮮) 단군’이라 쓸 것과 (중략)|《조선왕조실록》숙종 28권, 21년(1695 을해 / 청 강희(康熙) 34년) 6월 6일(병신)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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