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메뉴 열기

바뀜

크기가 바뀐 것이 없음, 3년 전
== 조선 ==
=== 역사 ===
[[조선시대]]에는 개국과 함께 [[명나라]]의 제후 입장을 취함으로써 국모의 존위를 비(妃)로 규정했다. 그러나 태조 5년에 [[조선 태조|태조]]의 정비(正妃)인 현비(顯妃) 강씨가 서거함에 개국 공신이자 국가 경영에 동참한 국공을 높이 기려 존호를 추상해야 한다는 공신들의 건의 아래<ref>《조선왕조실록》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8월 16일(신축) 2번째기사</ref> 왕후(王后) 직이 부활하여 강씨가 [[신덕왕후]]로 추존되고 후(后)의 예우로 상장례가 치뤄졌다.<ref>《조선왕조실록》태조 10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9월 28일(계미) 1번째기사</ref><ref group="주">황제의 장례는 7월장, 제후의 장례는 5월장이다. [[신덕왕후]]의 장례는 6월장으로 치뤄졌다. [[조선 태종|태종]] 때 태조가 사망하자 제후의 예에 따라 5월장으로 치뤄졌으며, [[조선 세종|세종]] 때 [[조선 태종|태종]]의 정비인 [[원경왕후]]가 사망하자 [[조선 태종|태종]]은 중국의 예법을 예를 삼아 왕과 왕비가 동급일 수 없다하여 [[원경왕후]]의 장례를 세자와 동급으로 3월장을 치루게했다. [[조선 태종|태종]]의 사후 [[조선 세종|세종]]의 정비인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부부를 동급으로 예우한 한반도의 오랜 전통을 부활하여 [[소헌왕후]]의 장례를 조선 임금과 동등한 5월장으로 치루도록 했는데 이는 이후 조선의 왕비의 장례로 법제화됐다.</ref><!--예외는 있었음. 인종의 장례를 4월장으로 치룬 것에 대한 보복으로 문정왕후와 그 아들인 명종 부부의 장례가 4월장으로 치뤄졌고, 인조의 초비인 인렬왕후의 장례는 장지 선택 미스로 어쩔 수 없이 6월장을 치뤘음-->
 
3년 후인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조선 태조|태조]]의 원배(元配)로서 추존 비(妃)가 됐던 절비(節妃) 한씨의 아들인 [[조선 정종|정종]]이 임금으로 즉위하여<ref>《조선왕조실록》태조 15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9월 5일(정축) 3번째기사</ref> 다음 달 임금의 생모 자격으로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존해 [[신덕왕후]]와 동급에 올리고올리되<ref>《조선왕조실록》태조 15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11월 11일(계미) 1번째기사</ref> 처 김씨를 왕후가 아닌 비(妃, 덕비(德妃)) 올린다.책봉하여 이로태조와 정도전이 독립국의 국모 작위인 왕후를 부활시킨 것에 대해 분개한 명과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1차 왕자의 난에 동참했던 구 신진사대부들을 위로·회유했다. 3년 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조선 정종|정종]]의 동복 아우인 [[조선 태종|태종]]이 임금으로 즉위하여 아내 민씨를 비(妃, 정비(靜妃))에 올리고 [[조선 정종|정종]]의 비 김씨를 왕대비로 삼는다.<ref>《조선왕조실록》정종 6권, 2년(1400 경진 / 명 건문(建文) 2년) 12월 1일(신묘) 1번째기사</ref> 이는 조선에서 왕후의 정의가 '사망한 왕비를 내부적으로 추존한 작위'로 개조된 배경으로, 여기에 대한 태조의 대립이 존재했는데 바로 태종 6년에 성비(誠妃)로 책봉된 [[성비 원씨|원씨]]에 대해 태종은 적모의 예우를 올렸으나 태조는 후궁이라 못을 박았던 것이다.
 
태종 8년에 [[조선 태조|태조]]가 서거하자 [[조선 태종|태종]]은 생모 [[신의왕후]]를 [[신의왕태후]]로 다시 격상<ref>《조선왕조실록》태종 16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9월 6일(신해) 3번째기사</ref>하여 [[신덕왕후]]의 윗전에 놓고 태조의 3년상을 마친 뒤 [[조선 태조|태조]]와 [[신의왕태후]]의 신주 만을 태묘(太廟: 종묘)에 부묘했다. 이어서 처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처를 맞이하는 중혼을 금지하고 이미 중혼을 한 자의 경우엔 혼인 순서로써 처첩을 구분토록 하는 제도를 세우니<ref>《조선왕조실록》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3월 10일(기축) 1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세조 35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2월 30일(정미) 2번째기사 中 "옛날 전조(前朝: 고려)의 말엽에 있어서는 사대부(士大夫)가 아내를 두고 또 아내를 얻으며 임의로 방자(放恣)하고 아울러 두 아내를 두고서 이름하기를, ‘경외처(京外妻)’라고 하니, 명분(名分)이 등급(等級)이 없는 데 이르렀습니다. 우리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전조(前朝)의 폐단을 다 혁파하고, 그 강상(綱常)이 어지럽혀짐을 염려하여, 아내를 두고 취처하는 것을 금(禁)하는 법을 엄히 세웠습니다. 그 금법을 범함이 있으면 즉시 발각(發覺)되지 않고 죽은 자가 있어 비록 이르기를 ‘성례(成禮)하였다.’고 하더라도 뒤의 사람을 첩(妾)으로 삼는 것이 영갑(令甲)에 실려 있으니,"</ref> 이는 [[신덕왕후]]를 첩으로 낮춤으로써 [[왕자의 난]]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피력하기 위함이었다.
세종 12년에 제후국에서 태후를 쓰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지적으로 이후부턴 왕비가 서거하면 태(太)를 뺀 왕후로 추존토록 결정<ref>《조선왕조실록》세종 48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4월 6일(을해) 5번째기사</ref>하였는데 이땐 이미 [[신덕왕후]]의 왕후직과 권리가 모두 철폐된 상황이었다. 세종 12년 음력 4월 6일을 시점(始點)으로 조선의 국모는 왕비에 봉작되었다가 사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고종 31년까지 지속된다.
 
이후 고종 31년에 왕실의청과의 존칭이관계를 개칭하면서단절하고 독립국 입장을 취하면서 왕실 작호가 전면 개정됐다. 이에, 왕의 적배를 왕비로 삼았다가 왕비가 사망한 후에 왕후로 추존하는 옛 규례를 폐지하고 왕의 적배를 왕후로 삼도록 제도가 개정되었고 경칭 역시 전하에서 폐하로 바뀐다.<ref>《조선왕조실록》고종 32권, 31년(1894 갑오 / 청 광서(光緖) 20년) 12월 17일(기미) 1번째기사</ref><ref group="주">중국 황실에서 폐하를 쓰는 건 오직 황제 뿐으로, 황후의 공식 경칭은 황태자와 동등히 전하이다.</ref> 조선 역사상 살아생전 왕후에 봉작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이 바로 훗날 대한제국의 수립 후 [[명성황후]]로 추존되는 민씨이다.<!--그러나 다음해인 고종 32년에 발생한 을미사변의 연장으로 일제의 압박 아래 대행왕후 민씨가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고<ref>《조선왕조실록》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2일(경인) 1번째기사</ref>, 다음 날 [[조선 고종|고종]]의 특사(特賜)로 후궁의 작위인 빈(嬪)으로 책봉되었다가<ref>《조선왕조실록》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3일(신묘) 2번째기사</ref>, 이 해 10월 궁에 무력 진입하여 일국의 국모를 시해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자 일제와 [[김홍집]] 내각은 폐후(廢后)에 관한 조칙이 무효화되었고 다시 왕후로 복작되었다. 고종 34년 1월에 이르러 대행<ref group="주">대행(大行)은 서거한 왕과 비의 시호가 결정되기 전까지 작위 앞에 붙이는 칭호이다. 대행왕, 대행대왕, 대행왕비, 대행왕대비, 대행대왕대비, 대행왕후를 쓴다.</ref>왕후 민씨의 시호(諡號)를 문성으로 정하여 문성왕후가 됐다가 이 해 3월 시호를 개망해 명성왕후로 개칭했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