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콩가루 (토론 | 기여)
잔글 콩가루 사용자가 홍건의 난 문서를 홍건적의 난 문서로 옮겼습니다: 백:문서 이동 요청/2015년 6월#홍건의 난 → 홍건적의 난
20번째 줄: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적은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그 뒤에는 수군으로써 황해·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공의 주역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파두반(破頭潘) 등이며,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홍건적은 [[음력 11월 11일]]에 절령(岊嶺 : 자비령)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수도 개경(開京)에 육박하여 왔다. 이에 공민왕 및 왕실과 정신(廷臣)은 남쪽인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안동]])로 대피하게파천하게 된다. 왕가(王駕)가 [[이천시|이천]]에 도착하던 날 홍건당은 개경을 함락하고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홍건당은 개경 입성 후 2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홍건적이 개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모병했다. 복주에 있던 공민왕은 그해 음력 12월경에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 음력 1월,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