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루아부르고뉴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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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공 필리프는 1363년부터 1404년까지 부르고뉴위 필리프 2세로서 통치를 하였다. 1369년, 그는 스스로 미망인 당피에르가의 마가렛과 결혼을 하였고, 1384년에 그의 장인인 플랑드르의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플랑드르 백국|플랑드르]], [[아르투아 백국|아르투아]], [[르틀의 백작과 공작|르틀]], [[느베르 백국|느베르]]를 상속받았지만, 부르고뉴 자치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직속 속국이 되었다. 다음해, 그는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용맹공 장]]을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와 필리프의 딸 [[부르고뉴의 마가레트|마가레트]]와 혼인한 [[바이에른 공작 빌헴름 2세]]의 자매 사이에서 태어난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비텔스바흐가의 마르가레테]]와 혼인시켰다. 1380년에 [[샤를 5세]]가 이미 사망하면서, 필리프와 함께 [[앙주 공작 루이|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은 미성숙한 [[샤를 6세]]의 섭정을 맡았다. 샤를 6세가 심각해지던 정신 착란으로 고통받을때, 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드 발루아|오를레앙의 루이 1세]]의 강한 반발과 마주치며 프랑스 왕국 너머로 자신의 영향력을 퍼트렸다. 플랑드르에서 자란 용맹공 장은 1404년 그의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부르고뉴 공국과 그의 어머니 당피에르가의 마가렛이 지녔던 유산을 하나로 합쳤다. 느베르와 르틀의 프랑스 백작영지를 그의 동생들인 [[느베르 백작 필리프 2세|필리프 2세]], [[브라반트 공작 앙트완|앙트완]]에게 나눠졌고, 그는 프랑스 영토가 [[잉글랜드 왕국]]과의 백년전쟁으로 파괴당하는 동안 능숙하게 시소타듯이 정치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는 발루아 가의 친척인 오를레앙의 루이 1세와 다투었고, 그를 1407년에 암살시켰다. 오를레앙과의 남은 긴장상태는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장 공작은 [[헨리 5세]]와 동맹을 맺고 1418년 [[파리 (프랑스)|파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다음해에 [[아르마냐크파]] 지도자인 [[탄귀 뒤 카스텔]]에게 매복당하여 살해당한다.
 
장의 아들인 [[선공 필리프]]는 1419년에 부르고뉴 공작에 올랐고, 프랑스 도핀 [[샤를 7세]]와 대항해서, 1420년에 [[트루아 조약]]을 맺으며, 그의 아버지와 동맹이였던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동맹을 재개하였다.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1421년(1429년부터 유효)에 제국령인 [[나무르 백국]] 계승으로 인한 획득, 제국의 공국인 [[랭부르 공국|랭부르]], [[브라반트 공국|브라반트]]를 그의 친척인 [[브라반트의 필리프 1세|필리프 1세]]에게서 상속받으면서 영토 확장에 집중하였다. 그는 또한 1433년 슈트라우빙의 마지막 후손인 [[에노 공작부인 자클린|자클린]]이 신성 로마 제국령인 [[에노 백국]], [[제일란트 백국]], [[홀란트 백국]] 거기에 [[프리지아 자유국]]을 그에게 넘기면서 그의 어머니 비텔스바흐가의 마르가레테와 그의 작은 아버지인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의 유산인 [[바이에른-슈트라우빙]]을 확보하였다. 1435년 [[아라스 조약]]으로 선공 필리프는 샤를 7세의 프랑스 통치를 인정하였고 결국 프랑스 왕가에게서 부르고뉴 영토의 공식적인 독립에 도달하였다. 1441년 그는 또한 마지막 여공인 [[괴를리츠의 엘리사베트]]에게서 [[룩셈부르크 공국]]을 얻어냈다.
 
이상적인 [[기사 (군사)|기사도]]적인 공작의 모습을 지녔던 발루아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스스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헬러]]의 획득으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가 만들어졌다. 샤를의 계획은 [[합스부르크가]]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에게서 "부르고뉴 국왕"이라는 인정 협상과 그의 딸 [[부귀공 마리|마리]]를 프리드리히의 아들 대공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을 통해 그의 왕조의 부흥을 완수하는 것이였다. 황제의 거부에 격분한 샤를은 1474년에 실패한 [[노이스 공성전]]을 벌였고 [[로렌 공국]], [[구 스위스 연방|스위스 연방]]을 상대로 [부르고뉴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공작은 1477년에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남자쪽은 단절되고 말았다.
 
부르고뉴 공국의 유산은 아버지가 죽은지 7달 후, 부르고뉴의 마리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대공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갔고 1479년 [[귀네가트 전투]]를 통해서 [[루이 11세]]의 부르고뉴 유산에 대한 주장에 의해 피할 수 있었다. 프랑스 왕은 아르투아에 있는 부르고뉴 공국 재산, 피카르디에 있는 옛 부르고뉴 공국의 영지만을 차지 할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는 갑작스럽게 유럽 제일의 왕실 가문으로서 성장했지만, 프랑스와 여러 세기를 거친 오랜 경쟁관계가 되었다.
 
== 부르고뉴 공작 (1363–1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