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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유언에 의해 즉위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의 친아우[同母弟]인 [[국반 갈문왕김국반]](金]國飯葛文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박씨(朴氏)이다. [[김승만|진덕여왕]](眞德女王)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척 총명했다고 한다.
 
즉위하던 해([[647년]])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파견해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김승만|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해왔다. 이에 [[신라]]는 압독주(押督州)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군주(軍主)이던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는 한편 [[648년]]([[김승만|진덕여왕]] 2)에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냈다. 이로써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宿衛外交)를 전개하였다. 또한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인 결과 [[신라]]는 지금까지 [[신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던 [[당나라]] [[당 태종]](太宗)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김춘추]] 일파의 주도 아래 [[당나라]]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모방한 대규모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을 이른바 한화정책(漢化政策)이라고 한다. 먼저 [[649년]]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는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를 실시하였다.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太和)를 버리고 [[당나라]] [[당 고종]](高宗)의 연호였던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관제(官制)와 연호(年號)의 사용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651년]]에 백관(百官) 왕에 대해 행하는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를 실시하였다. 또 종래의 품주(稟主)를 개편(稟主)하여 국왕직속의 최고 관부로서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고 품주의 본래 기능은 신설된 창부(倉部)로 이관하였다.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승진시켜 집사부의 수장 중시(中侍)를 삼고 기밀사무를 맡겼다. 이는 토착기반을 가진 귀족들의 정서를 인지하거나 주변국의 사정을 파악하지 못했던 선덕여왕대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배제하고 [[김춘추]]를 포함한 여왕지지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정치개혁이었다. 또 시위부(侍衛府)를 개편했는데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김유신]]의 군사력이 주축이 되어 개편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듯 [[김승만|진덕여왕]]은 왕권안정을 위한 집사부 설치 율령체제를 운영하는 좌이방부(左理方府)의 신설 각 행정관부의 체계화 등 개혁을 통해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지향했다. 그렇지만 [[김승만|진덕여왕]]대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김승만|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훗날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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