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모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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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한국 전쟁]] 당시 [[평안북도]] [[원산]]에 살고 있던 [[백성학]]은 주일학교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원산만에 갔다가 [[1.4후퇴]] 피난민 대열에 떠밀려 남하하는 배를 타게 되었고 10살 때 전쟁고아가 되었다. 그 때부터 백성학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식당 종업원, [[병원]] 청소부, 구두 닦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다가 우연히 모자 공장 공원으로서의 자리를 얻게 되었고 하루 18시간 이상 온갖 궂을 일을 해가며 모자 제조 기술과 점포 및 공장 관리를 배우게 되었다.
3년 뒤인 [[1959년]] [[2월 5일]], 19세의 백성학은 18만원의 자금으로 [[청계천]] 4가 개천가에 노점 형태의 [[모자]]점을 차리고 자립하였다.
 
1960년 당시 모자업계는 여름 한 철 몇 종류의 모자만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지만 영안모자는 미국내 [[백화점]] [[카달로그]]를 입수하여 일 년 내내 제품 개발에 열중하였고 당시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국내 모자 시장에 뜻하지 않은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아이젠하워와 수행원들의 복장이 일반 대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이를 계기로 챙이 작고 색상이 다양한 파나마 모자가 크게 유행하게 되면서 영안모자의 제품은 빠르게 팔려 나갔다. 그 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국내 경기가 위축되었고 모자업계도 불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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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1월에 [[강서구 (서울특별시)|강서구]] [[화곡동]]에 제3공장을 준공하면서 대한민국 판매를 중단하고 수출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 무렵 백성학은 '영안(Young An)'이라는 고유 상표를 [[개발]], 수입업자들의 상표 대신 모든 제품에 영안 고유의 [[상표]]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영안 상표를 부착한 영안모자는 [[1975년]]에 이르러 약 15개국에 수출하게 된다.
 
[[1976년]] 11월에 제4공장을 준공하였고 [[1977년]] 9월에 제5공장 준공 및 제지 텍스공장, [[플라스틱]]공장, 판지공장, 원단가공공장 등 계열 공장을 늘려 나가면서 모자 산업은 확산일로를 걷게 된다. 이러한 성장세를 바탕으로 영안모자는 [[1978년]] 12월 수출고 1000만달러를 넘었고 종업원도 1500여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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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모자그룹}}
{{재벌}}
{{토막글|기업}}
 
[[분류:부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