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포인트 찰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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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5-10-11}}
{{정리 필요|날짜=2015-10-11}}
[[파일:CHECKPOINTCHARLIECheckpointCharlie1989.jpg|600px|섬네일|1986년도 체크 포인트 찰리]]
 
'''체크포인트 찰리'''(“체크포인트 C”)는 [[냉전]] 당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분단하던 [[베를린 장벽]]의 가장 유명한 검문소를 [[연합군]]에서 지칭했던 지명이다. [[동독]]과 [[소련]]에 의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소련의 국경선을 넘으며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사람들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1961년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독과 서독의 분단을 나타내는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1961년도의 베를린 위기때 미국과 소련의 탱크 대치가 이 장소에서 발생했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을 한 이후에는 체크포인트 찰리 검문소는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오늘날에 이 검문소는 베를린 근처 달렘(''Dahlem'') 연합군 박물관에 위치해있다.
 
==배경==
===1950~60년대의 이주 제한===
{{본문|양독국경|동구권의 이주와 탈주}}
1950년대초부터 소련은[[소련]]은 탈주제한을 강화하면서 국경선을[[국경선]]을 치밀하게 관리했었다. 그러나 지배하에 있던 독일의[[독일]]의 1952년도 까지, 동독과[[동독]]과 서독을[[서독]]을 분리하는 분단 선에는 대체적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지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양독 국경은[[양독국경]]은 닫혔고 철조망 담으로 둘러져 졌다.
그러나 독일내의 국경선이 1952년에 공식적으로 닫힌 후에도 4나라의 지배를 받던 베를린의 경우는 도시 내에서 분단 선을 통해 오가기가 수월했었다. 그렇기에 베를린은[[베를린]]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서독]]으로 넘어가는 주요 루트가 되었었다. 베를린은 동서를 나누던 분단선의분단 선의 유일한 구멍이자, 당시 동 베를린[[동베를린]] 주민들의 돌파구이자 희망이었다.
 
1961년도까지 350만명, 즉 동독의 주민들 중의 20프로가20%<ref>Dowty, 서독으로Alan 탈출을(1989), Closed Borders: The Contemporary Assault on Freedom of Movement, Yale University Press, ISBN 0-300-04498-4</ref>가 [[서독]]으로 [[탈출]]을 했었다. 탈주자들은 대부분 젊고 좋은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부분의 지식층이 빠져나가면서 동독의 손실이 상당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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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lickr.com/photos/allhails/2337152673 1960년 7월31일 : 베를린 장벽과 체크포인트 찰리가 생기기전의 모습]'''<br />
<br />
전문가들의 두뇌유출로[[두뇌유출]]로 인해 동독의[[동독]]의 정치적 신뢰성과 경제적 안전성이 큰 타격을 입어서 [[소련 제국의]]의 국경 재 확보가 시급했었다. 1949년과 1961년 사이, 250만명의 동독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을 했었다했다..<ref>Gedmin, Jeffrey. "The Dilemma of Legitimacy". The hidden hand: Gorbachev and the collapse of East Germany. AEI studies 554.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p. 35. ISBN 978-0-8447-3794-2.</ref> [[베를린 장벽이장벽]]이 세워지기 전 3년동안 이 수치는 증가했었다증가했다: 1959년에는 14만 4천명, 1960년에는 19만9천명 그리고 1961 첫 7개월동안만 20만7천명. 따라서 동독의 경제난은 심해져만 갔었다.<ref>Dowty, Alan (1988), "The Assault on Freedom of Emigration", World Affairs 151</ref>
 
1961년 8월13일, 이후 [[베를린 장벽으로장벽]]으로 발전한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철조망 담이 처음 동독인들에[[동독]]에 의해 세워졌다. 이틀 후, 경찰과 군인(army engineers)들이군인들이 영구적인 콘크리트 벽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장벽과 더불어 830 마일 길이의 3.5마일 넓이의 무인지대인 “죽음의 구역”(death''Death stripStrip'')<ref>http://www.dailysoft.com/berlinwall/history/facts_03.htm</ref>도 만들어졌다. 그곳에는 탈주자들의 속도를 늦추고 발자국을 남기기 위한위해 파인 흙 밭 그리고 지뢰 밭까지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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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포인트 찰리는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 짐머 거리(''Zimmerstraße'')와 마우어 거리(''Mauerstraße'')의 교차로에 위치한 [[베를린 장벽의장벽]]의 검문소였다. (Mauerstraße. 우연하게 오래된 역사적인 이유로 '벽의 거리'라는 의미를 지님) 이것은 프리드리히슈타트의 인근에 위치해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외국인과[[외국인]]과 연합군을[[연합군]]을 위한 단 하나의 검문소로(도보 또는 차량) 지정되어 있었다. (연합군은 프리드리히거리 철도 역과 같이 외국인이 사용하는 다른 섹터의구역의 검문소를 이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찰리라는 이름은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음성 기호 문자 C에서부터 왔다.; 마찬가지로 서쪽으로부터 아우토반에아우토반(''Autobahn'')에 위치한 다른 연합군의 검문소에는 헬름슈테드(''Helmstedt'')에 위치한 [[체크포인트 알파]], 그리고 그곳에 대응하는 베를린 남서부 모서리의 드렐린덴(''Dreilinden'')과 반제(''Wannsee'')에 위치한 [[체크포인트 브라보가브라보]]가 있다. 소련은[[소련]]은 단순하게 이곳을 프리드리히거리 검문소(''Friedrichstraße Crossing Point'')라고 불렀고, 동독은 체크포인트 찰리를 공식적으로 프리드리히-침머거리 [[국경]] 검문소(''Grenzübergangsstelle'')라고 불렀다.
 
가장 눈에 잘 띄는 베를린 방벽의 검문소로서, 체크포인트 찰리는 종종 스파이 영화나 책에 특별하게 나온다. [[연합군]] 관계자, 국군과 방문객 모두를 위한, 카페 아들러("독수리 카페"),라는 유명한 카페와 조망위치가조망 위치가 검문소의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무언가를 먹고 마시면서 동독을 볼 수 있는 좋은 전망 위치였다.
<br />
'''[http://checkpoint-charlie.berlin-brigade.com/images/mapcheckpointcharlieepsd.jpg 체크포인트 찰리의 지도]'''<br />
 
'''[http://checkpoint-charlie.berlin-brigade.com/images/ccbaubaracketable100.jpg 보수중인 체크포인트찰리 : 찰리 검문소는 항상 임시 건물이였다]'''
 
찰리 검문소는 신기하게도 비대칭이었다. 28년의 활동적인 기간 동안, 그 동쪽 방면의 사회기반 시설은 벽, 망루와 지그재그 장벽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승차자를 확인하는 다차선의 작업장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연합당국은[[연합군]]은 절대 그 어떠한 영구적인 건물을 설립하지 않았다. 그리고 1980년대동안1980년대에는 거대한 금속 구조물로 교체된 유명한 나무 헛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서독에서 연합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것들의 이유는 그들은[[연합군]]은 내부 [[베를린]] 지구 경계선을 국제 국경이라고[[국경]]이라고 고려하지인식 않았고,하지 또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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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Checkpoint Charlie sign.JPG|200px|left|thumb|Replica of the famous sign at the former East–West Berlin border
File:Bundesarchiv Bild 183-87665-0002, Berlin, Mauerbau, Checkpoint Charlie.jpg|East German guards checking permits of bus passengers going through the checkpoint in October, just after the Wall was built on 13 August 1961
File:Bundesarchiv Bild 183-88574-0001, Berlin, Mauerbau, Friedrichstraße.jpg|Bus going through the East Berlin checkpoint
File:Bundesarchiv Bild 183-88574-0003, Berlin, Mauerbau, Friedrichstraße, Panzersperre.jpg|[[Czech hedgehog]]s just inside East Berlin
File:Bundesarchiv Bild 183-88832-0001, Berlin, Mauerbau, Friedrichstraße.jpg|Checks by East German guards
File:CHECKPOINTCHARLIE.jpg|thumb|Checkpoint Charlie in 1986
File:Kennedy in Berlin.jpg|US president John F Kennedy at Checkpoint Charlie in 1963
File:Checkpoint Charlie1.jpg|The Western (foreground) and Eastern (background) checkpoints, with the latter's famous watchtower, which was demolished in 2000
File:Swj02-vi.jpg|Pedestrians crossing the Eastern checkpoint, with the new checkpoint structure being constructed behind in 1984
File:Bundesarchiv B 145 Bild-F079005-0015, Berlin, Grenzübergang Checkpoint Charlie.jpg|The Eastern checkpoint in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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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quandly.com/article/470/image/1 1961년 8월15일 : 기자가 포착한 동독 군인 Conrad Schuman의 탈출 모습]''' <br />
'''[http://flashbak.com/wp-content/uploads/2014/11/PA-25126961-738x1024.jpg 1961년 9월10일 : 건물에서 뛰어 탈주를 하는 모습]''' <br />
'''[http://e-flux.com/journal_images/1241414673car.jpg?b8c429 컨버터블에 타서 탈출 시도하던 모습]''' <br />
 
그중 동독주민들이 도망치기위해 차로 체크포인트 찰리의 문을 들이받고 탈주를하기도했었고. 접이식 자동차(컨버터블)로 장벽에 접근해 자동차를 벽에 밀착시킨 후 지붕을 내려 서독으로 도망쳤다. 어떤이들은 고속열차를 몰고 경로이탈을 범하고 분단선을 넘기도했었고, 심지어 열기구를 타고 탈주한 기막힌 사건도 발생했었다. 1979년도에는 분단선 아래로 16일 동안 동굴을 파서 단체로 서독에 입성하기도 했었고. 동독주민 만큼 탈주가 급했던 동독군인들 마저도 가뿐히 가시철사를 뛰어 넘어가기도 했었다. 그외에도 분단선 근처 아파트에서 창밖으로 뛰어 넘어가는 시도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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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페히터(Peter Fechter)의 죽음===
[[파일: Peter_Fechter.jpg|섬네일|왼쪽|Peter Fechter]]
 
'''[http://2.bp.blogspot.com/-LsncsMFxohE/UC7-bdi8zJI/AAAAAAAAAew/ApcyHSMBV0A/s1600/Corbis-BE062743.jpg 무인지대 안에서 총에 맞아 죽은 Peter Fechter]'''
[[파일: EUCOM_Checkpoint_Charlie_Standoff_1961.jpg|400px|섬네일|1961년 소련과 미국의 탱크 교착사건]]
'''[http://www.1961-1989.de/wp-content/uploads/2012/08/titelseite-berliner-morgenpost-peter-fechter.jpg 1962년 8월18일 Peter Fechter의 죽음이 Berliner Morgenpost의 일면을 장식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파일:Body of Peter Fechter lying next to Berlin Wall.jpg|400px|섬네일|1962년 8월17일 : 무인지대 안에서 총에 맞아 죽은 Peter Fechter]]
1962년 8월18일 Peter Fechter의 죽음이 Berliner Morgenpost의 일면을 장식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장벽이 건설된 지 약 일년 후, 1962년 8월17일 피터 페히터는 친구 헬무트와 함께 동독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 계획은 베를린 장벽 짐머거리 주변에 있는 목공소의 작업실에 숨어 있다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죽음의 띠로 가는 것이었다.죽음의 구역을 건넌 뒤 가시돋힌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 2미터 벽을 올라간 후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에 있는 서독의 크로이첸베르크 주로 가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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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도착하였을 때 경비대는 그들에게 총을 쐈다. 헬무트는 벽을 통과하는데 성공하였지만 페히터는 수백명이 보고 있는 가운데 벽에 매달린 채로 골반에 총을 맞았다. 그는 동독 쪽의 죽음의 구역으로 떨어졌고 신무기자들을 포함한 서독의 주민들이 보고 있음에도 방치되었다. 그가 비명을 질렀지만 동독으로부터의 어떠한 의료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서독 또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독의 경찰은 그에게 붕대를 던져주었으나 그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약 한시간 뒤에 과다출혈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죽음의 결과로 서독에 수백명의 시위대가 형성 되었고 국경 수비대에게 "살인자"라고 소리 질렀다.
 
[[파일:Fechter_Mahnmal_Nah-Vorderansicht.jpg|썸네일| Peter Fechter의 기념비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
피터 페히터에 대한 의료 지원 부족은 상호간에 공포의 결과였다. 서독의 행인들은 총의 위협 때문에 그를 돕는 것을 방해받았다. 타임지에서 보고된 것에 따르면, 미군 소위가 서베를린 미 사령관으로부터 특별 지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꿈적하지 않고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서베를린으로부터 의료 지원을 확실히 불가능하게 되어지는 재판 중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범죄과학 병리학자 Otto Prokop의 보고에 따르면 "페히터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오른쪽 엉덩이에 박힌 총알은 심각한 내부손상을 야기했다". 비슷하게 동독 국경 소대의 지도자는 3일 전에 발생한 동독 군인 Rudi Arnstadt가 서독 연방 경찰에 의해 총을 맞은 사건 때문에 그 일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진술하였다. 그렇다하더라도 동독 국경 군인들은 그가 떨어진 뒤 한시간 후에 피터 팻처의 죽은 시채를 회수하였다.
 
이소년이이 소년이 죽은 자리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위에는 "er wollte nur die Freiheit"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라고 세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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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체크포인트 찰리==
 
===체트포인트 찰리의 보존===
[[파일:Checkpoint_Charlie_Berlin.jpg|가운데|썸네일|600px|왼쪽|관광지 체크포인트 찰리]]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에 개방되었고 체크 포인트 부스가 1990년 6월 22일에서 제거되었지만, 위병소가 제거되었던 1990년 10월의 독일 통일 이전까지, 체크 포인트는 외국인과 외교관에 대해 공식적인 횡단로였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지금 베를린-Zehlendorf에 위치한 연합군 박물관의 야외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이전의 장벽과 국경의 모습은 지금 자갈들로 이루어진 선으로 거리에 표시된다. 국경 횡단을 표시했던 위병소의 복사본 그 기호는 체크포인트 찰리가 한때 있었던 곳에 나중에 지어졌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1961년에 건립된 국경을 향한 샌드백 장벽 뒤에 존재하는 최초의 위병소와 유사하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수년에 걸쳐 서로 다른 크기와 레이아웃의 위병소(사진 참조)로 수회 교체되었다. 1990년에 제거된 것은 처음의 그것보다 상당히 컸으며 샌드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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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Bundesarchiv Bild 183-1990-0622-028, Berlin, Abriss Checkpoint Charlie.jpg| 1990년 6월22일 제거중인 체크포인트 찰리
File:Friedrichstr1990.jpg|Remnants of the Wall at Checkpoint Charlie in July 1990
File:Bundesarchiv Bild 183-1990-1113-305, Berlin, Abbau Grenzübergang Checkpoint Charlie.jpg|The eastern checkpoint being dismantled in November 1990
File:Bundesarchiv Bild 183-1991-0131-303, Berlin, Abbau Grenzübergang Checkpoint Charlie.jpg|Checkpoint Charlie in January 1991
File:Checkpoint Charlie - part of the original first building.JPG|Part of the original first building&nbsp;– now in [[Allied Museum|AlliiertenMuseum]] in Berlin-Dahlem
File:Original Checkpoint Charlie.JPG|The Checkpoint Charlie building at the time of the fall of the Berlin Wall, at its current site at the [[Allied Museum|AlliiertenMuseum]]
File:CheckPointCharlie Berlin 2011.jpg|Checkpoint Charlie's location i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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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1990년 6월22일 달렘 연합군 박물관으로 이동중인 검문소 Haus am Checkpoint Charlie
[[파일:FW_Checkpoint_Charlie_Museum.JPG|400px|썸네일|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위병소의 근처에 위치한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Haus am Checkpoint Charlie)는 Rainer Hildebrand에 의해 1963년에 개장한 개인 박물관이며 1990년대에 새로운 건물로 보강되었다. 체크 포인트 기념비에 나타난 두 군인들(미국과 러시아)은 모두 1990년대 초 베를린에 주둔했다.개발자는 사무실과 상점을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하여, 2000년에 동독 체크포인트 망루를 철거했다.그 망루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원래 체크 포인트 찰리의 구조였다. 도시는 망루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망루가 역사적인 랜드마크로 분류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키지 못했다. 2011년 8월, 어느 것도 이 지역에 건설되지 않았고 개발을 위한 초기의 제안은 종료되었다.
 
베를린의 주요 관광지 : 체크 포인트 찰리
 
체크 포인트 찰리랑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은 베를린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관광객들은 위병소 앞에 서 있는 연합 군사 경찰로 분장 한 배우들과 유료로 촬영 할 수 있다. 군사 모조품들로 이루어진 여러 기념품들이 있고 상점들도 많아지는 중이다.
 
블랙박스 - 냉전의 역사 전시장 Die Mauer/The Wall Asisi Panorama
 
===체크포인트 찰리 관련 전시들===
2006년 여름에 야외 전시도 열렸다.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짐머 거리(Zimmerstraße)를 따라 있는 갤러리 장벽에 탈출 시도, 어떻게 체크포인트가 확장했는지, 냉전 시대에서 그 중요성, 세부적으로 1961년 소련과 미국의 탱크들의 충돌 과 같은 정보들이 전시되어있다. 2012년에는 기존에 체크포인트 찰리가 위치하던 장소 근처에 대형 사진들,영상들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이 자료들을 제공하는 블랙박스-냉전의 역사(Blackbox-The History of Cold War) 전시장이 개관되었다. 그 해 9월에는 블랙박스 옆에 분단 당시의 상황을 보다 더 느낄수 있게 Asisi Yadegar의 파노라마 작품 프로젝트 Die Mauer/The Wall도 관광객들에게 제공이되었다. 냉전 그리고 독일의 분단과 장벽에 대한 정보 제공에 힘을 쓰고있다. 그리고 2015년에는 블랙박스 전시장을 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http://www.visitberlin.de/sites/default/files/imagecache/high_l_slideshow_580_237/blackbox_580x237.jpg 블랙박스 - 냉전의 역사 전시장(Blackbox - The History of Cold War)]''' <br/>
'''[http://www.visitberlin.de/sites/default/files/imagecache/high_l_slideshow_580_237/asisi_mauerpanorama_580x237_c_tom_schulze__asisi.jpg Die Mauer/The Wall Asisi Panorama]'''
 
2006년 여름에 야외 전시도 열렸다.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짐머 거리(Zimmerstraße)를 따라 있는 갤러리 장벽에 탈출 시도, 어떻게 체크포인트가 확장했는지, 냉전 시대에서 그 중요성, 세부적으로 1961년 소련과 미국의 탱크들의 충돌 과 같은 정보들이 전시되어있다. 2012년에는 기존에 체크포인트 찰리가 위치하던 장소 근처에 대형 사진들,영상들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이 자료들을 제공하는 블랙박스-냉전의 역사(Blackbox-The History of Cold War) 전시장이 개관되었다. 그 해 9월에는 블랙박스 옆에 분단 당시의 상황을 보다 더 느낄수 있게 Asisi Yadegar의 파노라마 작품 프로젝트 Die Mauer/The Wall도 관광객들에게 제공이되었다. 냉전 그리고 독일의 분단과 장벽에 대한 정보 제공에 힘을 쓰고있다. 그리고 2015년에는 블랙박스 전시장을 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이다. <ref>http://www.visitberlin.de/en/feature/wall-panorama-and-blackbox-opening</ref>
 
 
==예술 속 체크포인트 찰리==
'''[http://www.br.de/radio/bayern3/sendungen/stars-und-hits/veronica-ferres-stars-und-hits-120~_v-img__16__9__xl_-d31c35f8186ebeb80b0cd843a7c267a0e0c81647.jpg?version=47e34 "Die Frau vom Checkpoint Charlie"中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시위중인 Sara Bender "내 아이들을 돌려줘!"]''' <br/>
'''[https://thewallmemories.files.wordpress.com/2009/10/jutta.jpg?w=300&h=224 1984년도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일이시위 벌이던 Jutta Fleck의 모습1]'''<br/>
'''[http://www.phoenix.de/fm/8/Frau_v_Checkpoint_Doku.AB.jpg 1984년도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일이시위 벌이던 Jutta Fleck의 모습2]'''<br/>
 
"Die Frau vom Checkpoint Charlie"<ref>http://www.arte.tv/de/die-frau-vom-checkpoint-charlie/3006078.html</ref> (사랑의 국경선 / 체크포인트 찰리의 여인)는 Jutta Fleck(유타 플룩) 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프랑스-독일 공동 출자 문화 방송국인 Arte를 통해 2007년 10월 처음 방영됐다. 영화 속 주인공 사라 벤더는 두 딸들과 함께 1982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아이들과 떨어지게 된다. 동독에 남겨진 아이들을 되찾게 위해 외국인들이 지나가는 곳이자 동독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몇 년간 시위를 한다. 영화 속의 체크포인트 찰리는 주인공이 일인시위를 벌인 상징적이며, 외국인들이 지나감으로써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동독의 심기를 건드린 전략적인 장소이다.
"Die Frau vom Checkpoint Charlie"中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시위중인 Sara Bender "내아이들을 돌려줘!" 1984년도 체크 포인트 찰리에서 일이시위 벌이던 Jutta Fleck의 모습
 
"Die Frau vom Checkpoint Charlie" (사랑의 국경선 / 체크포인트 찰리의 여인)는 Jutta Fleck(유타 플룩) 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프랑스-독일 공동 출자 문화 방송국인 Arte를 통해 2007년 10월 처음 방영됐다. 영화 속 주인공 사라 벤더는 두 딸들과 함께 1982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아이들과 떨어지게 된다. 동독에 남겨진 아이들을 되찾게 위해 외국인들이 지나가는 곳이자 동독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플랜카드를 들고 몇 년간 시위를 한다. 영화 속의 체크포인트 찰리는 주인공이 일인시위를 벌인 상징적이며, 외국인들이 지나감으로써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동독의 심기를 건드린 전략적인 장소이다.
 
냉전을 배경으로 영국과 동독 첩보전을 그린 John Le Carre의 영국 유명 소설 The Spy who ame in through the Cold, Gerard de Villiers의 프랑스 첩보 소설 시리즈 S.A.S 중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Berlin : Check-point Charlie 심지어 제임즈본드 시리즈 와 같이 냉전의 상징답게 첩보물의 단골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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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권의 이주와 탈주]]
*[[베를린 장벽]]
*[[독일]]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소련]]
{{Col-end}}
 
==바깥고리==
* [http://www.mauermuseum.de/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Museum Haus am Checkpoint Charlie) 홈페이지]
*[http://www.alliiertenmuseum.de 연합군 박물관(Allierten Museum) 홈페이지]
*[http://www.dailysoft.com/berlinwall/history/checkpoint-charlie.htm Berlin Wall Online]
==출쳐==
 
{{외부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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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
* Sarah Scott Southam News, As a U.S. military band played songs of Berlin, Checkpoint Charlie..., CanWest News [Don Mills, Ont] 22 June 199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