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침례교: 두 판 사이의 차이

26 바이트 제거됨 ,  6년 전
 
=== 신앙고백의 의의===
청교도들은 카톨릭과 성공회가 번갈아 획득한 국가 권력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이 시기에 장로파 청교도들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독립파의 사보이 신앙고백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고, 침례파 청교도들도 1차, 2차에 걸처 런던신앙고백을 발표되기도 했다. 침례파 청교도들은 장로파나 독립파 청교도들에 비해 더 많은 박해와 반대를 받았는데, 다른 청교도들에 비해 정권 참여도가 낮았고 상대적으로 교세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생존과 교회 자립에 분투해야만 했던 침례파 청교도 지도자들은 다른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탁월한 신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있었으나 신학 논문과 저술에 그들의 역량을 사용하지 못했고 오직 교회 개척과 목회적 사명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하지만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정부의 핍박이 거의 사라진 후, 정치에 깊게 발을 담궜던 장로파와 독립파 청교도들이 정치적으로 축출되어 그 교회들의 교세가 크게 위축된 시기에도 오히려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특수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은 정권의 박해 속에서 빛난 지도자들의 순수함까지 더해 지역 교회의 결집된 단결력과 교회 간의 연합을 이끌었다. 실천적으로는 성경적 교리의 건전성과 삶의 순수함을 사회에 드러냄으로써 영국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받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 결과 천로역정의 존 번연으로부터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에 이르기까지결과로 특수 침례교회는 잉글랜드 각 지역에 뿌리를뿌리 내리며 잉글랜드의 주류 교회가 되었다. 특히그 중에서도 특수 침례교회의 '1689 신앙고백'(제2차 런던신앙고백)은지금도 영미권과 세계 각 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함께 개혁파 교회들의 가장 건전한 교리와 신앙문서로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파일:LCF.jpg|섬네일|오른쪽|x250픽셀| 1677/1689 confession of faith 표지]]
 
=== 1689 신앙고백의 명칭 ===
1644년에 이어 1689년에 두 번째로 런던에서 채택된 특수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은 런던에서 두 번째로 채택되었다는 뜻에서 “제2차 런던신앙고백”(The Second London Confession)이라고 하거나, 명확한 구분을 위해서 채택된 년도를 부각시켜 “1689 신앙고백”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개혁파 침례교회들은 간명하게 줄여 “1689 침례신앙고백”으로 즐겨 부른다. 간혹 학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목적으로 작성된 년도(1677)와 채택된 년도(1689)를 동시에 표시해 “1677/1689 런던신앙고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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