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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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10월]] 주교의 추천으로 그는 파리에 있는 [[리세 루이르그랑]](Louis-le-Grand, 루이왕립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리세 루이르그랑]] 재학 중 로베스피에르는 [[철학]]과 [[역사학]], [[윤리]], [[법률]] 등의 과목만큼은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로마 공화국]]의 이상과 [[키케로]]의 수사와 카토 등 고전 인물들을 접할 수 있었다. 동급생으로 [[카미유 데물랭]]과 [[스타니슬라 프레롱]]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루소를 접했으며, 그에서 많은 원칙을 채용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의식으로만 홀로 서는 고결한 자아의 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ref name="fatal">Fatal Purity. 2006.</ref> 그는 학창시절 내내 술과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흡연, 음주를 하는 학생들을 심각하게 경멸하였다. 그는 졸업 후에도 불량했던 자신의 동창들은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고, 경멸하거나 냉정하게 외면하였다.
 
[[루이 16세]]는 [[대관식]] 직후 루이르그랑 학교를 방문했고, 당시 17살이던 로베스피에르는 500명의 학생들 중 대표로 선출되어 환영사를 읽었다. 상을 받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출은 당연한 것이었다. 연설 당일 로베스피에르와 군중들은 빗 속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국왕 [[루이 16세]] 부부는 도착하자마자 머물렀고, 기념식 직후 바로 가버렸다.<ref name="fatal" /> 왕은 학생대표인 그의 축사에 답례도, 국왕 내외를 열렬히 환호하느라 장기간 기다리던 학생들에 대해서도, 한마디의 의사 표시도 없이 지나쳤다.
 
추위와 비오는 와중에도 국왕 [[루이 16세]]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교사들에 의해 동원되어 학교 청소 정리를 해야 하는 것과, 수고한 학생들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루이 16세]] 내외를 보고 사려가 부족한 지도자라고 질타했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국왕 내외를 서서히 불신하기 시작, [[국민 공회]]에서 루이 16세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즉시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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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는 국민의회의 어떤 소위원회나 분과 위원회에 선출되지도 못했고, 의장과 부의장직에 도전했지만 뽑히지도 못했다. 단 한번 [[1790년]] [[6월]] [[국민의회]] 서기로 선출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코뱅파]] 내부의 [[산악파]]에 속해 [[지롱드파]] 내각이 추진하는 대외 전쟁에 반대했다. 그의 전반적인 이미지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사형제 폐지]] 법안》을 제출했고, 범인의 부모를 비롯한 범인 친족에 대한 [[연좌제]] 형벌을 금지하는 법안에 관여하는 등 인권변호사 상승의 의원으로 많은 인도주의 법안에 관여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목소리도 작았고, 초창기에는 다소 당황해하기도 했으나 이내 적응해나갔다. 그의 의견에 대한 반대의견이 많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성공적으로 자기 의사를 전달했으며 그의 제안은 항상 많은 박수와 동의를 받았다.
 
또한 제한 선거의 철폐, 봉건제 폐지, 여성 차별 철폐, 영주(領主)와 귀족이 사사로이 탈취한 토지반환 운동 등을 주관하였으며, 반 왕정 운동을 주도하였다. [[1790년]] [[4월]] [[자코뱅 당]]의 당수가 되고, [[6월]] [[국민의회]] 서기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에는 [[베르사유 혁명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유]]와 권리를 국민 스스로가 자각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는 그러한 소신을 공공연히 밝혔고, 평당원에게도 권위를 휘두르지 않는 등 직접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그의 소신과 위해 열성적인 활동은, 오히려 피로를 느낀 아군, 적당한 타협을 원하던 부르주아층 사이에서 많은 적이 생겼으며, 위험인물로 꼽히거나 그 이상의 비난도 받았다. [[1791년]] [[6월 20일]]부터 [[6월 21일]] [[루이 16세]] 일가가 도주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왕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고, 국왕을 사형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같은 혁명파 의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지지자를 확보, 끌어모으기 위해 [[헌법]]에 대한 투표를 서두르도록 촉구하였고, 그 중에서도 혁명사상, 변화에 대한 의욕이 있는 자들을 찾으려 분주히 노력했다.
 
그는 소시민과 노동자의 입장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시도 하였다. 1791년 6월 파리 고등검찰관으로 선출되었지만 사퇴하고 계속 혁명활동에 매진했다. [[1793년]] 혁명 정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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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7월]] "프랑스인에게 고하는 연설 (Adresse aux Fransc)"를 발표, 로베스피에르는 애국자들은 군대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입대를 독려하는 그는 내 가족과 내 재산을 지키는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부패귀족과 관료들의 해임, 처벌 선에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일부 온건파 [[지롱드파]]벌과 온건파 왕당파들은 그가 쿠데타를 기도하려 한다고 비방하였다.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 바로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군주제의 존속을 바라는 온건파 [[라파예트]] 후작이 지휘하는 왕실 근위대는 [[마르스]] 광장에서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시위대들에게 총격과 창 공격을 가했다. 희생자들이 나타나는 가운데 왕실 근위대와 용병들은 소수의 선동자를 찾으려 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로베스피에르는 몸을 피해 시위대를 벗어나, 자신의 열성적 지지자인 [[목공]] 겸 [[가구장]]인 [[모리스 뒤플레]]의 집에 은신해서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자코뱅당]]의 온건파들이 모두 [[지롱드당]]으로 합류한 뒤에도 로베스피에르는 [[생 쥐스트]] 등 소수와 함께, 열악한 사회적 환경과 자금 환경 속에서도 계속 [[자코뱅당]]을 꾸려나갔다.
 
==== 국민회의 대의원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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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9월 3일]] 제정된 [[프랑스 헌법]]의 전문의 기본 골격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의 준수를 촉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일반 하층민과 빈민층의 보통선거 참여, 16세 이상의 모든 시민에 대한 동등한 선거권 부여, 지역별 대표자 선출, 정부 근위대, 각료, 공무원, 군 장교 계급의 자격제한 철폐와 연령 제한 철폐 및 청원권을 위해 싸웠으며, 신분과 문벌, 인맥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시스템도 반대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왕과 소수 귀족이 독점하는 사회는 문벌로 사람을 채용하고, [[부르주아]]와 상공인이 독점하는 사회는 인맥과 연줄로 사람을 채용한다고 비판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모든 분야, 모든 부문의 인재 채용을 공개경쟁채용으로 선발할 것과, 이해당사자나 가까운 자들을 선발 대상자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의회의 결정에 대한 왕의 거부권 남발을 반대하고, 행정권의 남용을 반대하였으며, 사람에 대한 종교적 차별과 인종적 차별을 배격했다. 또한 배우와 연예인들, 기술 직공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반대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유대인, [[흑인]][[노예]] 들을 옹호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강제로 납치된 흑인 노예들을 석방을 시키고 사과해야 하며, 자신들의 원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791년]] [[9월]]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이 프랑스에 재통합되는 것을 지지했다.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베르사유에 체류할 때뿐만이 아니라 외출 중일 때, [[파리]]에서도 항상 저렴한 옷과 바늘질을 해 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등의 검소한 생활양식과 매일 빨래를 손수 하여 깔끔하고한 옷차림과 단정한 용모, 그리고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깎듯한 소박한 예의범절을 지켜나갔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감명받는 이들과, 오히려 이를 피곤하게 여기는 이들이 동시에 늘어나게 되었다. [[국민의회]]가 자진해산하자 숨어있던 그는 나왔고, 파리 시민들은 개선행진을 벌여 로베스피에르를 맞았다.
 
==== 입법의회 개원과 의원직 사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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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는 왕실과 왕당파의 왕실 복귀 계획, 왕당파와 오스트리아의 공모, 군대의 준비부족, 귀족출신 장교들의 반란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며 1792년 2월 귀족 출신 장교들의 해임을 건의하여 대량 정군을 단행하였다. 한편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등은 그를 축출하려다가 실패하고 도리어 [[오스트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로베스피에르는 왕실과 왕당파가 외부로 탈출하려는 것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등의 개입을 촉구하려던 비밀음모를 적발하여 이를 폭로했다. 이어 왕당파와 [[오스트리아]]의 공모 및 내통, 귀족 출신 장교들과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의 사기 문제를 지적, 국민으로 구성된 국민 군대로 군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귀족출신 장교들의 실전 경험 없는 점을 들어 무능력을 지적했고, 왕에 대한 충성으로 반란이나 학살을 일으킬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동시에 로베스피에르는 [[낭시]]에서 시민을 공격하라던 상관의 명령을 거절하고 저항했다가 투옥당한 샤토비외 연대의 사병들을 애국군인이라며 변호했다. [[자크 피에르 브리소]] 지지자들이 반론을 제기하자 로베스피에르는 "헌법의 수호자 (Le Défenseur de la Constitution)"라는 신문을 창간, 발행하여 자신과 [[자코벵파]]의 입장을 대변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군 사령관이 된 라파예트를 공격하면서, 라파예트가 군사 쿠데타를 통한 군사 독재 정권을 세우려 한다고 의혹을 제기, 논설을 통해 라파예트의 해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라파예트를 해임하고, 체포, 추방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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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변과 실각 ===
==== 공안위원회 위원장 ====
[[1793년]] [[4월]]에 [[공안위원회]]가 창설되었을 때 로베스피에르에게 위원장에 추대되었지만 그는 사양하였다.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공안위원회의 위원장에 추대되자 이때는 수락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동료들이 외교사절로 떠나 있거나, 각자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자코뱅파]] 단체와 자경단, 혁명민병대 등을 직접 동원하여 혁명세력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애썼다. 집정관이자 국민공회 의장이고, 집권 [[자코뱅당]] 당수였던 로베스피에르는 당,정,의회를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파리 급진주의자들이 식량난을 이용해 파리 시민들을 선동한 '앙라제(Enragés) 시위(화난 사람들이라는 뜻)를 벌인 것을 음모로 규정하여 적발했다. [[1793년]] [[9월 5일]] 로베스피에르는 시위군중들과의 공개 면담에서, 모든 식료품과 기본 생활필수품의 최고 가격을 정하고, 물가를 최대한 억제하며, 국내 치안에 혁명민병대를 동원해 반혁명분자와 왕정 부활주의자, 약탈, 매점매석, 곡물 사재기 행위, 부패 관료를 이유 불문하고 단속,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규모 징병과 군대 조직을 위해 그는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국민 군대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국가, 정부 주도하의 상공, 경제관리를 위해 자신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하고 일단 신뢰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왕당파나 지롱드파에 대한 무분별한 처형에는 반대했으며, 지롱드 당원과 국왕의 누이를 체포하는 데 대해 항의했던 의원들을 보호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지롱드당]] 및 온건파 [[자코뱅당]]원의 타협론을 비판하면서도, 반대파에 대한 무분별한 처단에는 반대했다. [[당통]] 등으로부터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비난을 받은 한편, 이러한 태도 덕에 급진파들로부터는 우유부단한 [[부르주아]]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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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테르미도르의 반동}}
[[파일:Shot.jpg|200px|thumb|반로베스피에르파에 의한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프랑스 혁명력]]의 열한 번째 달인 테르미도르(양력 [[1794년]] [[7월]]) 초에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다들 언제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을 죽일지 걱정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다시 여론의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7월 23일]] 공안위원회와 [[7월 26일]] 국민공회에 출석하여 자신은 사심이 없이 일했음을 밝히고, 국민의 공정한 판단을 호소했다.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가 공회에 나타나 반혁명파를 숙청하겠다고 말하자 의원들은 "반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출처|날짜=2014-2-14}}라고 저항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7월 26일의 마지막 연설에서 그는 처음에는 박수갈채를 받았으나 곧이어 동요가 일면서 끝내는 의회의 재석의원 과반수가 그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자코뱅당]] 산악파는 이미 관용파와 강경파로 나뉘었고, 그가 무차별 처형을 강행한다고 본 관용파와 반대로 우유부단하다고 본 급진파가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국민회의]]에서의 연설을 마치고 26일 저녁의 자코뱅 클럽의 모임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7월 27일]] 반대파들은 [[국민의회]] 회의장을 사전 봉쇄, 로베스피에르가 출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로베스피에르의 입법의회 연설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즉 [[7월 27일]] [[부르주아]]층과 온건파 왕당파 및 온건파 혁명파가 주도하는 반로베스피에르 파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공포 정치는 민심을 그에게서 떠나보냈던 것이다. [[국민의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생 오귀스탱 및 동료 3명을 반혁명 혐의로 재판정에 고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뤽상부르 감옥]]으로 호송되었지만 그곳의 간수장은 로베스피에르의 투옥을 주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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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시청]]으로 갔다. 그곳에는 로베스피에르의 지지자들과 [[상퀼로트]] 파 일부가 집결해 있었고, 로베스피에르는 마음만 먹었다면 시청 주변 혹은 외곽에서 반대파에 대해 투쟁을 계속 지속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파리 코뮌 정부]]가 시내 몇몇 지구에 무장부대를 소집해 놓고 시청에서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를 일으키자는 권고에 대해 로베스피에르는 봉기 주도를 거부했고, 몇시간 후 그를 위해 죽음을 맹세했던 그의 친위부대도 결국은 해산하기 시작했다. [[국민공회]]는 7월 27일부로 의장직을 박탈하고 로베스피에르를 범법자로 선포하였다. 지지자들을 해산시킨 후 그는 시청에서 스스로 자신의 턱에 권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지만 중상을 입어 잔류한 지지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7월 27일 저녁 늦게 [[국민공회]]의 병사들은 시청을 공격해 손쉽게 로베스피에르와 그 추종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때까지 살아 있던 강경파의 또다른 지도자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열렬한 추종자인 [[생 쥐스트]] 역시 순순히 체포된다.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자신이 많은 사람을 처형했던 도구인 단두대에 올라가 살해됐다. [[생 쥐스트]], [[조르주 쿠통]], 친동생인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 등 22인과 함께 살해됐다. 108명이 로베스피에르의 이념을 지지한 죄로 사형당했고, 수백 명이 투옥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서거로 혁명 주도권은 [[부르주아]]가 장악했고 [[나폴레옹]]이 등장할 때까지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