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외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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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일찍부터 〈양모제품법〉이나 〈철법〉으로 식민지에서의 공업 발전을 방해했고, 영국과의 무역 이외의 독자적 무역을 금지해 왔지만, 여기서 더 엄격한 [[중상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식민지를 더욱 압박했다. [[7년 전쟁]]의 일환으로 [[북아메리카]]의 식민지 지역에서 벌어진 [[프렌치 인디언 전쟁]](1755~63년)의 종결은 프랑스 · 영국과 미국간의 관계에 변화를 야기하였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 패함으로써 1763년에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동쪽을 영국에, 서쪽으로는, 플로리다를 영국에 빼앗긴 [[스페인]]에 양도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비밀 조약으로 서쪽 영토를 되찾았다. ) 한편, 1763년 [[대영 제국]]은 무려 1억 3000만 [[영국 파운드|파운드]]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한 해 이자만 450만 파운드에 달하는 액수로 제국 유지비용의 상당액을 《[[인지세법]]》(1765년), 《[[타운젠드법]]》(1767년) 등 각종 과세를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충당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대영 제국]]의 결정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표들의 참여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13개 식민지]]는 “[[무대표 무과세|대표의 참여 없는 세금 부담은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격렬한 반대 운동의 전개로 영국은 이듬해 이 세금을 철폐했지만, 이번엔 〈[[차법]]〉으로 차의 무역을 독점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개척민들은 1773년에 [[보스턴 항구]]를 습격하여, ‘[[보스턴 차 사건]]’을 일으켰다. 보스턴 차 사건에 충격을 받은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폐쇄하고, 주민들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애국자라 불리던 독립파 인사들은 서신 교환을 통하여 영국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독자적인 의회의 구성에 합의하였고 이들은 1774년 [[1차 대륙회의]]를 개최하고, 식민지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영국에 대하여 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자(1775년) 미국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1775년 4월 영국의 주둔 병사와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병대 사이에 충돌([[렉싱턴 콩코드 전투]])이 발생하여 이것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즉, 13개 식민지는 영국 제국을 상대로 [[미국 독립 전쟁]](1775~83년)을 치렀다. 개척민 대표들은 [[제2차 대륙 회의]]를 개최(1775년)하여, [[조지 워싱턴]]을 전쟁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륙군]]을 결성하였다. [[미국]] 내의 왕당파가 인구의 30%에 이르렀음에도 독립파들은 전쟁 기간 동안 식민지의 80%가 넘는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며 [[대영 제국]]은 일부 해안 지역만을 방어할 수 있을 뿐이었다. 1776년 7월 4일 대륙 회의에서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한 개신교적 사상을 드러낸 현대 민주주의의 원점이 된 [[미국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신생 국가 (1776 - 1789)===
[[조지 워싱턴|워싱턴]]을 총 사령관으로 하는 독립군은 [[미국 독립 전쟁|독립 전쟁]] 초기에 [[영국]]군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1778년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후 [[스페인|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이후 워싱턴의 지구전 전략과 [[프랑스 왕국]] 해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세는 독립군에게 점점 유리해졌다. 미국의 [[대륙군]]은 1776년 ‘[[트렌턴 전투]]’와 1777년 ‘[[새러토가 전투]]’, 그리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대영 제국]]의 군대에 승리하였다. 영국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미국과 영국 제국은 1783년 9월 3일에 [[파리 시|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조약 (1783년)|파리 조약]]〉으로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영국]]은 [[미국의 독립|미합중국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이로서, 1783년을 양국의 국교 수립년도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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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해리 S. 트루먼}}
 
트루먼의 등장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신봉했던 파시즘의 종식을 전제로 한 미국 외교정책의 전면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트루먼은 반소 감정이 매우 강해, 이미 상원의원 시절에 "독일군들과 소련군들이 피가 다 빠질 때까지 싸웠으면 좋겠다"는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는 국제주의적인 협상과 타협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해선 소련이라는 '세계적인 깡패'에 대해 십자군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출처|날짜=2013-7-29}}
 
트루먼 재임시, 미군은 조선의 38선 이남을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시까지 다스렸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하였다. 이 선언은 [[이승만]]을 비롯한 남한의 정치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마침내 미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타결 없이 1947년 8월 해산하였다. 미국은 1947년 9월 [[유엔 총회]]에 한국문제 해결을 위탁했다. 소련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게 된다. 1948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 날짜로 미군정은 통치권을 한국정부에 일임하고 해체되었다. 미국은 [[한국 전쟁]](1950년~1953년) 당시 유엔군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편에서 참전하여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1년 9월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과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그 해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조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