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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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이수광은 [[병조판서]]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희검]]과 문화유씨(文化柳氏)의 1남 4녀 중 아들로 태어났다. [[태종]]의 서자로 [[효빈김씨]](孝嬪金氏) 소생 [[경녕군 이비]]의 5대손이다. 고조부는 모양군 직이고, 증조부는 선사군이며 증조부 선사군은 할아버지 하동군 이유와 양 할아버지 신당군 이정 형제를 두었다. 그러나 신당군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하동군의 아들들 중 한사람인 [[이희검]]이 신당군의 양자가 되었다.
 
왕족의 후손으로 아버지 [[이희검]](李希儉)은 [[중종]] 때의 청백리 정승 [[유관]](柳寬)의 외증손이기도 했다. [[유관]]은 정승의 신분임에도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고사가 전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희검]]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청백리로도 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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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급제와 임진왜란 ===
{{참고|임진왜란}}
1585년([[조선 선조|선조]] 18년) [[과거 시험|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이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성균관]][[전적]]을 거쳐 [[호조]][[좌랑]] 겸 [[지제교]](知製敎), [[병조]][[좌랑]] 겸 [[지제교]]를 지냈다.
 
그 뒤 승문원의 관리가 되었고, 1590년(선조 23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ref name="글로벌 이수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경상남도]] 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용인시|용인]]에서 패하였다. <ref name="글로벌 이수광"/>
 
그 뒤 [[경상우도]] [[방어사]] [[조준]](趙俊)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이때 [[밀양]][[부사]] [[박진 (조선)|박진]](朴晉)이 [[일본군]]의 침략을 보고 [[밀양성]]을 불지르고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를 비판하였다.
 
{{인용문2|[[박진 (조선)|박진]](朴晉)이 [[밀양]] [[부사]]로서 왜적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을 지키다가는 반드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으로 여겨 도망갈 계책을 내어 황산(黃山)으로 잔도(棧道)에서 왜적들을 방어하겠다고 핑계하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그대로 도망갔다.”며 비판하였다.<ref>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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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과 외교, 저술 활동 ===
1597년(선조 30년)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그해 [[정유재란]]의 종결을 보았다.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ref>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출처|어떤 자료}}에는 1597년의 북경행이 "주청사(奏請使)" 자격이었다고 보고 있다. </ref>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vi:Phùng Khắc Khoan|Phùng Khắc Khoan]])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다루었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10쪽 ISBN 9788991221284 <!--“1597년 진위사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온 풍극관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조선 학자의 지성에 깊이 감명받았기 때문이리라.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일본 상인에 팔려 안남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다. 안남에서 조완벽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수광과 같은 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남에서는 조완벽을 초대하여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고 이수광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조선에 돌아온 조완벽은 이 사실을 알렸고 나중에는 이수광에게까지 그 소문이 전해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을 밝혔다.”--> </ref>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ref>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출처|날짜=2011-10-12|어떤 자료}}에는 1597년의 북경행이 "주청사(奏請使)" 자격이었다고 보고 있다. </ref>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vi:Phùng Khắc Khoan|Phùng Khắc Khoan]])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다루었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10쪽 ISBN 9788991221284 <!--“1597년 진위사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온 풍극관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조선 학자의 지성에 깊이 감명받았기 때문이리라.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일본 상인에 팔려 안남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다. 안남에서 조완벽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수광과 같은 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남에서는 조완벽을 초대하여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고 이수광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조선에 돌아온 조완벽은 이 사실을 알렸고 나중에는 이수광에게까지 그 소문이 전해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을 밝혔다.”--> </ref>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선조]]의 사후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도승지]]<ref>승정원 승지들의 우두머리로 국왕의 비서실장격</ref>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승지]]로 발탁된 뒤,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고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선조]]의 사후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도승지]]<ref>승정원 승지들의 우두머리로 국왕의 비서실장격</ref>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승지]]로 발탁된 뒤,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고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10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그해 12월 [[예조]][[참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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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참고|인조 반정}}
1613년 [[대북]] 강경파의 건의로 [[인목대비]] 폐모론이 주청되자 그는 폐모론이 옳지 못함을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조선 광해군|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이수광은 관직을 떠나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 <ref name="송건호"/>{{Rp|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6년 [[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고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등용되어 도승지·대사간을 지내고 이 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 인조|인조]]를 [[공주시|공주]]로 모셨다.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 반정]] 이후에도 [[서인]]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1625년(인조 3년)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1625년에는 만언차자(萬言箚子)를 왕에게 올려 시정(時政)을 비판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그의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인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도]]로 모셨다.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628년(인조 6년) 12월 이조판서로 재직 중 병사했다.<ref name="글로벌 이수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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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촉잡기》(秉燭雜記)
*《찬록군서》(纂錄群書)
*《해경어잡편》(解警語雜篇)
*《잉설여편》(剩說餘篇)
*《승평지》(昇平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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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당대에 단아하고 염정하며, 또 문학에 재주가 있었다<ref>광해군일기 36권, 광해군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2월 22일(계사) 11번째기사 "이수광·장만·유공량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는 평가가 있다.
 
그는 [[실학]]의 길을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그 당시까지만 해도 [[월남]]의 존재는 [[사대부]]와 지식인 이외에는 모르는 이도 많았으나 그와 [[조완벽]]의 [[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조선]]사회에 월남(베트남)이라는 국가를 소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기타 ==
그의 상소문 중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올린 12조목의 〈조진무실차자〉(條陳懋實箚子) 상소는 당시 상소문 중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했고 [[한학]]과 고전 지식도 밝았다. 또한 [[일본어]]와 [[베트남어]] 역시 구사하고 통역, 번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