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화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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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근왕병을 모집하려 처조부 [[황정욱]] 등과 함께 [[강원도]]에 파견되었다가 일본군을 피해 회령으로 갔다. 그러나 왕자 신분을 내세워 행패를 부리다가 향리로 강등당해 [[회령]]으로 유배된 국경인(鞠景仁) 등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졌다. [[1593년]] [[일본]]으로 압송되기 직전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카의 협상이 성사되어 풀려났다. 살인과 물건갈취로 [[1601년]] 군의 작위에서 파면되었으며, [[1604년]] 호성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양인과 사대부, 노비 가릴것 없이 잡아 구타하였고, [[수원]]으로 유배당한 뒤에도 부사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오지 않는다 하여 물의를 빚었다. [[1607년]] 풍으로 사망하였고 시호는 [[조선 정조|정조]] 때 [[정존겸]]의 상소로 추서되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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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종결된 후에도 그의 사람 죽이는 버릇과 재물 약탈이 계속되어 양사로부터 계속 탄핵을 받다가 [[1601년]](선조 34) 파면되고, 순화군의 작위가 박탈당하였다가 뒤에 복작되었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과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을 책록할 때 순화군은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 1등의 한 사람으로 책록되었다. 그러나 양사의 탄핵은 계속되었고 수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수원부유수가 바뀌어 후임으로 오는 수원부유수 권경우(權慶佑)가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았다고 난리를 피워 물의를 빚기도했다. 그는 그해 [[10월 3일]] 왕명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 이수준(李壽俊)의 집에 안치되었다.
 
[[1604년]] [[한성부]]의 이수준의 집에 감금된 상태에서 [[풍]]에 맞아 병석에 누워있다가 사망했다. 사망하자 선조는 특명으로 그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다음은 순화군이 죽었을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인용문| 이보(李𤣰)가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