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라우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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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라우렐'''(José Paciano Laurel)은 [[필리핀]]의 제3대 대통령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여 군정을 실시할 때 내세운 [[필리핀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으로 내세워 졌다. [[코라손 아키노]] 정부의 부통령 [[살바도르 라우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생애 ==
[[File파일:Jose Laurel.JPG|thumb|220px|left|1922년 변호사 시절의 호세 라우렐]]
[[1891년]] [[3월 9일]] [[바탕가스 주]] 타나우안의 부유한 정치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테로 라우렐이었고, 모친은 호코바 가르시아였다. 그의 아버지는 [[에밀리오 아기날도]]의 혁명 정부에서 공직을 맡았으며, [[필리핀 헌법|1898년 마롤로스 헌법]]의 서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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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필리핀 식민지 정부의 내무 장관에 취임. 그 후, 상원 의원, 헌법 제정 의회 의원, 대법원 판사, 법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File파일:Greater East Asia Conference.JPG|thumb|300px|right|대동아 회의의 호세 라우렐]]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본에 협력하며, 필리핀 행정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제국 의회에서 [[도조 히데키]] 총리가 보여준 필리핀 독립의 방침을 받은 독립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헌법을 초안하였고, [[1943년]]에 일본의 영향 하에 있는 국민 의회에 의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동년 [[1943년]] 11월 필리핀 대표로 [[대동아 회의]]에 참석하였다.
 
일본의 패전이 예정되면서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의 조언으로 [[1945년]] 3월말 간신히 필리핀을 탈출하여 대만으로 향한다. 대만에서는 당초 비빔밥에 허술한 식사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 후, 일본 나라 현 나라호텔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후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전범으로 지정되어, 가족과 [[요코하마 감옥]]에 두 달간, 그리고 [[스가모 구치소]]에 열 달 동안 수감되었다. 종전 이틀 후인 [[8월 17일]] [[필리핀 제2공화국]]의 해체를 선언했다.
 
[[1946년]] 7월 귀국하여 친일 협력을 통해 132개 반역죄로 기소되었으나, [[1948년]] 4월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사면을 받는다. [[1951년]]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3년]]에는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옹립에 진력했다. [[1954년]]에는 경제 사절 단장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라우렐-랭리 협정”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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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에 공무에서 은퇴하며, 2년 뒤인 [[1959년]] [[11월 6일]]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같이 보기 ==
* [[필리핀 제2공화국]]
 
== 주석 ==
{{주석}}
 
== 바깥 링크 ==
* [http://www.pangulo.ph/prexy_jpl.php The Philippine Presidency Project - Jose P. Lau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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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렬:라우렐 호세}}
 
[[분류:필리핀의 정치인]]
[[분류:필리핀의 대통령]]
[[분류:1891년 태어남]]
[[분류:1959년 죽음]]
[[분류:A급 전범 용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