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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아버지 안티오코스를 기리고자 16개의 도시를 세웠는데, 안티오케이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입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인 기원전 300년에 토대를 닦았다. 안티오케이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로써 헬레니즘 세계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던 도시였다.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에 멸망당한 뒤에도 안티오케이아는 [[근동]]에서 [[알렉산드리아]] 버금가는 로마 제국 제3의 도시로써 번영을 누렸다. 초기 크리스트교 시대 사도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포교 거점이 된 도시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땅이었다.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인(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이 거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며<ref>《사도행전》 11장 26절</ref>(《마태복음》에는 서부 시리아에서 성립되었다는 설도 싣고 있다) 훗날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아가 국교로 삼은 뒤, [[로마]],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과 함께 크리스트교 5대 교구의 지위를 얻고 총주교좌가 설치되어, 시리아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써 번영을 이어갔다. 현재에도 동방 정교회에서는 안티오키아 정교회와 안티오키아 총주교의 이름을 유지하는 교회가 여럿 있는데, 실제 활동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나 다른 도시로 옮겨간 상태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시대인 [[526년]] 5월 29일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25만에서 30만이 넘는 도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재건된 뒤로도 예전의 위용은 떨치지 못했고, 사산 조 페르시아의 거듭된 공격으로 안티오키아는 차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7세기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 제국에 패배하고 시리아를 잃은 뒤에는 안티오키아 주변에서 두 제국의 공격이 이어지며 안티오키아의 쇠퇴는 가속화되었고, 안티오키아는 북시리아의 지방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