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로셸 공성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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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셸 공성전'''은 1627년-1628년까지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국왕군과 [[라로셸]](La Rochelle)의 [[위그노]]들(Huguenots)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이 공성전은 프랑스의
== 배경 ==
[[파일:Entrance to La Rochelle harbour Claude Lorrain 1631.JPG|thumb|left|공성전 기간 라 로셸. [[클로드 로랭]]의 세부묘사 ''[[:File:Siege of La Rochelle by Claude Lorrain Le Louvre.jpg|Le siège de La Rochelle]]'',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의 [[앙리 4세]](Henry IV of France)가 공포한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에 의해 위그노에게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라 로셸]]은
1610년 가톨릭교도에 의해 앙리 4세가 암살되고,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Marie de' Medici)의 섭정과 동시에 [[루이 13세]]가 즉위하자 개신교에 대한 관용 정책은 친가톨릭 정책으로 회귀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은 약화되었다. 이 때문에 [[로앙 공작 앙리]](Henri de Rohan)와 그의 동생 [[수비즈 공작 벤자민 드 로앙|수비즈]] 공작은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1621년 [[위그노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루이 13세는 1621년-1622년에 [[생장당젤]](Saint-Jean d'Angély)을 포위해 함락시키고, [[라 로셸의 봉쇄]]를 기도했으나 전황이 교착되어 [[몽페리에 협정]]( Treaty of Montpellier)을 맺고 종결시켰다.
1625년 로앙과 수비즈은 다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루이 13세에게 [[레 섬의 점령]](Capture of Ré island)에 의해 종결되고 말았다. 이 사건 후, 루이 13세는 위그노의 제압을 바라고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도 위그노 제압이 왕국의 최우선과제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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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ple image| align = right | direction = horizontal | header = | header_align = left/right/center | footer = '''왼쪽 그림''': [[세블랑주]]에 상륙한 버킹엄 (세부).<br /> '''오른쪽 그림''': [[생마르탱드레 공성전]]에서 영국 군대.| footer_align = left | image1 =Landing_of_Buckingham_in_Sablanceau.jpg| width1 = 200 | caption1 = | image2 =English Siege_of_Saint_Martin_1627.jpg| width2 = 233 | caption2 = }}
잉글랜드 왕 [[찰스 1세]](Charles I)는 총신 [[제1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가 이끄는 80척의 함대를 라
당초 라 로셸은 국왕과 전쟁을 하는 것을 두려워해 버킹엄 공작과 동맹선언을 거절하고, 버킹엄 함대의 입항을 거부했으나 9월에 국왕군과 첫 충돌이 일어났기 때문에 동맹을 밝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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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왕군은 [[앙굴렘 공작 샤를 드 발루아|앙굴렘의 샤를]](Charles of Angoulême)이 이끄는 병사 7,000명, 기병 600명, 포 24문의 병력을 갖고 1627년 8월부터 라 로셸의 포위를 시작했다. 국왕군은 본그레느(Bongraine;현재 [[레 미님]](Les Minimes)과 [[포트 루이]](Fort Louis)를 증강했다.
1627년 9월 10일 라 로셸에서 포트 루이의 국왕국을 상대로 최초의 첫 대포가 발사되면서 제3차 [[위그노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라 로셸은 프랑스의
전투상태에 돌입한 국왕군의 공병부대는 길이 12km의 참호를 파서 요새 11개소, 보루 18개소에 이르는 포위선을 구축해 도시를 고립시켰다. 포위 요새들은 1628년 4월 전부 완성되어 병사 3,000명이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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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ouis XIII at the Siege of La Rochelle 17th century.jpg|thumb|left|라 로셸 공성전의 루이 13세.]]
==== 네덜란드 지원 ====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의 라 로셸을 제압하기 위해 같은 프로테스탄트의 암스테르담 도시에서 선박을 임대했다. 그 때문에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의 선박에서 프랑스 병사들이 로마 가톨릭의 설교를 받는 것을 허락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가 암스테르담 시의회에서 논의되었다. 논의 결과 허용하지 않는다가 되었다. 네덜란드 선박은 프랑스 병사를 라 로셸에 수송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하는 네덜란드의
==== 스페인 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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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ntree de Louis XIII a La Rochelle par Pierre Courtilleau.jpg|thumb|라 로셸에 입장하는 루이 13세, [[피에르 Courtilleau]].]]
라 로셸의
항복은 무조건이었고, [[알레의 화의]]( Peace of Alais)의 조건에 의해 위그노는 그들의 영지,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여러 특권을 잃어버리고, [[낭트 칙령]]에 의해 허락되었던 신앙의 자유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국왕의 자비 아래 놓이게 되었고,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으로 낭트 칙령을 철폐하고 개신교인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을 때는 저항할 수단이 없었다.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라 로셸 공성전의 결과는 개신교인들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뜨려 이후 [[퐁텐블로 칙령]]과 로마 가톨릭교회로의 강제 개종의 시작을 의미했다. 또 국왕이 프랑스 전 지역을 장악해 지방의 저항을 허용하지 않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이룰 수 있는 획기적인 일이 되었다. 직접적인 영향으로는 이 전투는 [[절대왕정]] 확립의 기초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제도에 장기적인 영향도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1627년 포위중인 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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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폐 ==
공성전 시기 로마 가톨릭교회와 왕국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공성전의 모습을 묘사한 일련의 [[프로파간다]]의 동전을 주조했다. 이들 동전에는 왕국의 권력을 유익한 빛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도시와 영국의 노력을 하찮은 빛으로 보이게 하는 상징적인 방법을 사용해 공성전을 묘사했다.<ref>[[Musée d'Orbigny-Bernon]] exhibit</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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