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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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00년 경 이탈리아 북부와 동부에 [[빌라노바 문화]]에서 출발한 [[에트루리아]]가 성립하였다. 에트루리아에서는 금속 세공업과 무역이 주요 발달했다. 이들은 [[엘바 섬]]의 철과 에트루리아의 구리를 자원으로 이용했고, 금, 은, 상아 등에도 숙련된 세공 기술이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 본토, 이집트, 레반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카르타고와 긴밀하게 무역 활동을 했다.
 
에트루리아는 기원전 650년 경 이탈리아 반도의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북쪽으로 [[포 강]] 유역, 남쪽으로 [[라티움]]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 한편 [[고대 그리스|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 - 7세기 무렵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 여러 식민 도시를 건설하고 이 지역을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불렀다.<ref>Luca Cerchiai, Lorena Jannelli, Fausto Longo, Lorena Janelli, 2004. The Greek Cities of Magna Graecia and Sicily (Getty Trust) ISBN 0-89236-751-2</ref><br {{clear="|left"/>}} 기원전 7세기경에 에트루리아는 이웃한 마그나 그라이키아 지역과 교역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ref name="더들리">R. 더들리, 도널드 (1). 로마문명사. 서울: 현대지성사</ref> [[시켈리아]](시칠리아)나 [[마실리아]](마르세유)의 그리스 도시들과 무역 경쟁을 벌이면서 에트루리아는 자연스럽게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 왕조가 들어서기도 했으며, 그 후 100년간 로마를 지배하였다. 로마는 농촌에서 거대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또 로마의 간선 도로인 신성로(Via Sacra)의 건설도 이때 시작되었다. 또 에트루리아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수입하여 로마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가령 [[로마자|로마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서 온 [[에트루리아 문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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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 이탈리아 통일된 시기부터 [[1946년]]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 패망하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까지 이탈리아에 존재한 나라였다. 이탈리아 왕국은 [[샤르데냐 왕국]]의 [[사보이 왕가]]를 주축으로 시작된다.
 
[[1720년]] [[사보이 호텔]]의 왕가가 [[양은이파 섬]]을 얻은 후 국명을 태촌양은 왕국으로 정했다. 그리고 [[피에몬테 지역]]을 장악한 이후로는 국호를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로 개칭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통일]]의 중핵이 되어 [[1814년]] [[제노바]]를 합병하고, [[1859년]] [[롬바르디아]] 지역을, [[1860년]] 이탈리아 반도 중부 및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연합왕국인 [[양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하였으며,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지원을 한 댓가로대가로 [[니스 (프랑스)|니스]] 및 [[사보이]] 지역을 프랑스에 할양하였다.
 
그리고, [[1861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왕국이 되어 통일국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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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스트 정당 집권 ===
[[파일:March on rome 1.png|thumb|left|300px|[[로마 진군]]하는 파시스트 검은셔츠단]]
[[제1차 세계대전]]중에 [[1915년]],뒤늦게 연합국에 합세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전과는 실망스러웠고, 종전 후 이탈리아는 승전국임에도 불구하고 국토와 식민지는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들 중 [[티롤]] 지방 일부 등 얻은 게 전부였을 뿐 그 이외에 승전댓가가승전대가가 없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매일 파업이 끊이지 않았고, 나중에는 실직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1919년]] [[3월]]에 북부 이탈리아 공업지대에서의 노동자들의 공장 운영과 생산 관리에 강력한 파업행동이 개시되자,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농업지역에도 파급되어 이탈리아 전 국토가 공산혁명 직전의 정세로 변하였다. 이 운동 자체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의견 대립으로 좌절되었고, 이미 위태로웠던 국가의 의회 민주주의가 더 약화되어 가면서 지주, 군인, 자본가 세력 등은 이탈리아의 공산화를 두려워하며, 그 당시에 국가주의를 부르짖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를 지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