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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공 윌리엄 ===
[[파일:William III of England.jpg|thumb|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
윌리엄은 1년여에 걸쳐 영국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윌리엄은 [[1687년]] 4월 그의 사절을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 (영국)|휘그당]] 지도자들에게 보내 비밀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는 사절을 통해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만약 전제정치에 반대하려고 한다면 자신은 왕족의 권리를 사용하여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약속했다. 윌리엄은 그 댓가로대가로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한 [[잉글랜드]]의 군사력 동원을 요청하였다. 이는 윌리엄이 새로운 가톨릭 왕위 후계자 때문에 늦어도 11월까지 영국을 침공하기로 협약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항로에 있는 함대의 지원에 대해 상호합의한 [[1688년]] 4월, 윌리엄은 군사적 정치,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 필사적이었기 때문이다.<ref>D. Hoak, The Anglo-Dutch revolution of 1688-89, p.24</ref>
 
[[1687년]] 9월, 그는 네덜란드의 수석 행정관 가스팔 파겔을 통해 영국 백성을 향한 공개 편지를 배포하였다. 여기서 그는 제임스 2세의 종교적 관용정책의 중단을 촉구하였고, 이는 암묵적으로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 침공 계획 ==
=== 명분 ===
윌리엄과 메리는 수 개월에 걸쳐 면밀한 침공 계획을 세웠다. 계획이 첫 번째 목표는 이들이 침공이 일반인들에게 외국의 침략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1688년]] [[6월 30일]]<ref>
 
윌리엄의 재빠른 준비는 프랑스를 놀라게 하였다. 루이 14세는 9월 초부터 시작되는 가을 폭풍으로 인해 그들이 준비를 마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개입 시기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실제로 10월 첫주가 지나기까지 날씨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의 함대는 발이 묶여 있었다. 그 해에는 가을 폭풍이 일찍 시작되었고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교황의 바람"이라 부르며 바람이 지속되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10월 말이 되자 폭풍은 끝나고 바람의 방향은 서풍에서 동풍으로 바뀌어 "개신교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함대는 3주나 기다린 끝에 10월 28일 출항하였다. 그러나 다시 바람의 방향이 남서풍으로 바뀌자 11월 9일 귀항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11일 함대는 다시 출항하였고 [[스페인 무적함대]]보다 4배나 많은 배에 6만의 병력과 5만의 말을 태운 네덜란드 군대는 [[잉글랜드]] [[하위크]]에 당도하였다. 바람이 북풍으로 바뀌자 윌리엄의 함대는 남쪽으로 밀려나 11월 13일에는 [[영국 해협]]의 [[도버]]와 [[칼레]]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영국 해군은 [[템즈강]] 어귀에서 네덜란드 해군이 지나가는 것을 두 번이나 지켜보기만 하였는데 첫 번째는 강한 동풍의 영향으로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이유가 석연치 않았다. 1688년 [[율리우스력]] 11월 5일([[그레고리력]] 11월 15일) 윌리엄의 대규모 군대가 [[데번 주]] [[브릭스햄]] 부근의 [[토베이]]에 상륙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많은 군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으며 이들 중 일부가 군대에 합류하였다. 그가 상륙한 11월 5일은 [[불꽃놀이 밤]]이자 [[화약음모사건]] 기념일 이었다. 그의 깃발에는 "잉글랜드의 자유와 개신교의 신앙, 나는 지켜낼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나는 지켜낼것이다"는 [[오랜지 왕가]]의 표어였댜.) 윌리엄의 군대는 대략 15,000에서 `8,000명의 보병과 3,000여 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14,352 명의 네덜란드 용병(이 용병들의 출신지는 스코틀랜드, 스칸다나비아, 독일, 스위스 등지로 다양했다.)과 약 5천여 명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자발적 입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병대들의 상당수는 [[위그노]]였으며 경비대에는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에서 건너온 200여명의 흑인도 있었다.
<ref>Robert Beddard, A Kingdom without a King: The Journal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in the Revolution of 1688 (Phaidon, 1988), p. 19. </ref>
용병 중의 상당수는 가톨릭 신자였다.<ref>Keith Schuchard, M. (2002), Restoring the Temple of Vision: Cabalistic Freemasonry and Stuart, Brill ISBN 90-04-12489-6, p. 762</ref>
 
== 제임스 2세의 몰락 ==
=== 이어지는 투항 ===
프랑스는 제임스 2세에게 원군 제공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훗날 지불해야할 댓가를대가를 염려하여 거절하였다. 제임스 2세는 토리당을 자신의 편으로 돌려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심사율]]에 대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제임스의 선봉 부대는 [[솔즈베리]]에 집결하였으며 제임스 2세는 율리우스력 11월 19일 자신의 주력 부대와 함께 합류하였다. 제임스 2세의 군대는 19,000여명의 병력이었다. 제임스 2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런던]]에서는 반 가톨릭 폭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제임스 2세 군대는 많은 수가 전의를 상실하였다. 그의 부대에는 충성심이 의심되는 상당수의 장교가 섞여 있었으나 제임스는 그들에 대한 체포를 명령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윈캔튼]]과 [[서머셋]]에서 작은 규모의 첫 교전이 발생했다. 제임스 군 측의 소수 정탐병이 윌리엄 측에 의해 격퇴되었으나 양측의 사상자 수는 15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제임스 군측 장교들은 조짐이 좋지 않다고 여겼다. 11월 23일 제임스 측의 최고 사령관 루이 드 듀라가 윌리엄 측에 투항하였고 그 다음날 사령관 중의 하나인 존 처칠이, 26일에는 제임스의 딸 [[그레이트브리튼의 앤|앤]]이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제임스는 런던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11월 18일 [[플리머스]]가 윌리엄에게 투항하자 그는 진격을 시작하였다. 23일 윌리엄은 솔즈브리에 당도하여 왕의 자문위원회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제임스 2세는 자유로운 선거와 반역자에 대한 일반 사면을 제공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미 잉글랜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그의 이러한 제안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제임스는 윌리엄이 반대자들의 요구대로 자신을 사형에 처하지는 않을지 두려워하였다. 자신의 군대마저 믿을 수 없게 되자 제임스 2세는 군대에 해산을 명형하였다. 12월 10일 리딩에서 양측 간의 [[리딩 전투|교전]]이 발생하여 제임스 2세의 군대는 퇴패하였다. 브리스톨, 히어포드, 요크, 켐브리지, 시로프사이어 등지에서 반 가톨릭 폭동이 발생하였고 도버 성은 개신교도에게 함락되었다. 12월 8일 윌리엄은 제임스 2세의 사자를 만나 제임스의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의 전쟁비용을 지불할 것과 잉글랜드 정부의 가톨릭 관료를 즉각 해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