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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이 되었으며, 그해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바로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국신사(國信使)로 요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가 되었으며, 동궁시학사로 재직 중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다시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리고 귀국하였다.
 
1099년 우간의대부·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임의]]와 인척이어서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건의로 따라 스스로 물러났다. [[110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다. [[1101년]] (숙종 6)되었고, 9월에 남경개창도감을 설치되자, 지주사(知奏事)로서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등과 양주에 파견퇴어 궁궐터를 물색하는 등 남경건설사업을 활발히 추진했다. 그리하여 1104년 5월 지금의 서울지역에 남경궁(南京宮)을 건설했다.
 
110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굉(李宏) 등과 함께 진사시험(進士試驗)을 주관했고, 이어 어사대부, 추밀원부사 등을 지냈다. 1103년 이부상서(吏部尙書) 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