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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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협약 ==
대왕대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당시 [[랭커스터 왕가]]의 출신으로 왕위에 제일 가까운 [[헨리 튜더|헨리 7세]]<ref>헨리 튜더는 [[에드워드 3세]]의 5대손이었으나, 외가였던 보퍼트 가문이 더 가까운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보퍼트가는 원래 서자 출신으로 비록 가까운 방계 왕가였으나 정통성이 항상 불안정하였다</ref>의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와 헨리 튜더를 왕위에 올려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한다는 결연을 맺혔다. [[1483년]] 12월, 렌느르네([[Rennes]])대성당에서 헨리 튜더는 엘리자베스와 결혼 선서를 맺고 왕위 찬탈을 위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에드워드 4세의 장녀로 남자형제가 모두 사망한 상태에서 엘리자베스는 강력한 왕위계승권자였고, 삼촌이 리차드리처드 3세가 사망한 후 적법하게 왕위를 이을 수도 있었지만, 여왕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헨리 7세는 안정적인 통치권을 확보하고, 다른 요크家 생존자들의 계승권을 약화하기 위해서라도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곤트의 존의 후손이라는 희박한 근거에 기대어 스스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요크가 후계자와의 결혼이 아닌 스스로 적법한 왕으로 통치하고자 하였으며, 권력을 나눠가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결혼 이전인 1485년 10월 30일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헨리 7세는 아내가 에드워드 4세의 후계자로서 가진 계승권과 정통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티툴루스 레기우스(Titulus Regius)를 제기하여 에드워드 4세 자녀들을 적출 소생으로, 에드워드 5세를 선왕으로 인정하였다. 교황의 승인을 받은 후, 1486년 1월 18일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결혼식을 올린다. 1486년 장남인 아서가 태어났고, 엘리자베스는 이듬해 왕비로 대관식을 올렸다. 이후 5명의6명의 자녀를 더 낳았지만 이 중 마가렛, 헨리, 메리만이 살아남았다.
 
비록 정치적 결합이었지만 결혼생활은 순조로웠으며, 부부는 서로를 존중했다. 왕비로서 엘리자베스는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행사하지 않았지만, 친인척과 시종, 후원자들에게 모두 다정하고 친절했다고 전한다. 음악과 춤, 주사위 놀이를 좋아했고, 그레이하운드를 길렀다.
남편인 헨리 7세는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은둔지로 몰래 떠나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게 했다”고 한다. 검소하다고 소문난 헨리7세 였지만 그녀를 위해 화려한 장례식을 열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레이디 채플에 묻혔다.
 
헨리 7세는 나중에 나폴리 왕의 미망인인 조안나, 카스티아의 여왕 [[후아나 1세|후아나 1세(카스티야)]], 사보이의 공작 미망인 마가렛 등과 재혼을 생각했지만 1509년 홀로 사망했다. 당시의 세금 징수 기록 등을 보면, 엘리자베스의 사망 이후 헨리 7세의 인색함과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인한 악명은 더욱 심각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매장되었다. 엘리자베스의 무덤은 19세기에 발굴작업을 거쳤는데, 납으로 된 관을 덮었던 나무 상자를 후손인 제임스 6세를 묻을 장소를 만드느라 없애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 엘리자베스 (1492-1495)
** [[메리 튜더 (프랑스의 왕비)|프랑스 왕비 메리]] (1496–1533)
** 서머싯 공 에드문드에드먼드 (1499-1500)
** 캐서린 (1503-1503)
 
==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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