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 카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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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뉴욕 타임즈는 포리스트 카터가 인종차별주의자 아사 카터와 동일인물이라고 폭로했다. 1956년에 아사 카터는 테네시 주의 클린턴에서 12명의 흑인 학생이 백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에 반대하여 분리 정책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그 영향으로 200명의 폭도들이 흑인이 운전하는 버스를 린치하는 등 폭동을 벌였다. 그가 조직한 그룹이 1950년대 흑인에게 린치를 가했고(카터의 클랜원들은 흑인 노동자를 공격해 성기를 절단하고, 그 위에 기름을 퍼부은 채 트렁크에 가두어 놓은채 가버렸고 그 피해자는 그렇게 죽어버렸다), 내부 분열 때문에 살인까지 일어나 버밍험 경찰은 한때 그를 고소하려고도 했다.
 
결국 한때 그의 고용주였던 조지 월래스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어두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터를 피했고, 이에 반발한 카터는 1970년 앨라배마 주지사 선거에서 월래스와 싸우게 되지만 그는 겨우 1.51%의 지지를 받고 낙선한다. 그 후 그는 텍사스에 정착해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심지어 자식들을 조카 취급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가 폭로했을 때도 자신은 아사 카터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1976년 뉴욕타임즈의 인터뷰에서 카터는 본인이 아서임을 부정했지만 그에 대한 다른 어떤 인터뷰도 거절했고, 카터의 부인 또한 인터뷰를 거절했었다. 하지만 91년 카터의 부인은 결국 포레스트 카터가 아서 얼 카터였다는 것을 증언했다.)
 
 
 
 
 
 
 
 
결국 한때 그의 고용주였던 조지 월래스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어두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터를 피했고, 이에 반발한 카터는 1970년 앨라배마 주지사 선거에서 월래스와 싸우게 되지만 그는 겨우 1.51%의 지지를 받고 낙선한다. 그 후 그는 텍사스에 정착해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심지어 자식들을 조카 취급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가 폭로했을 때도 자신은 아사 카터가 아니라고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