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롱드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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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롱드 설명 추가
완권 견제의 시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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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2 =[[파일:Coat of arms of the Duke of Orléans (as prince of the blood).png|15px]]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br />[[파일:Coat of arms of the Prince of Condé.png|15px]] [[콩데 공작 루이 2세]]<br />[[파일:Coat of arms of the Prince of Conti.png|15px]] [[콘티 공작 아르망 드 부르봉]]
}}
'''프롱드의 난'''({{llang|fr|La Fronde}})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최후의 반항에 의해 일어났던 내란이다. 프롱드라 함은 당시 파리의 어린이들이 관헌에 반항하여 돌을 던지는 놀이에서 사용한 '투석기'에서 유래된 말인데, 점증하는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제1회는 고등법원(高等法院)의 프롱드(Fronde Parlementaire, 1648∼1649), 제2회는 귀족의 프롱드(Fronde des nobles, 1649∼1653)이다.
 
[[루이 14세]]의 즉위(1643) 당시 모후(母后)와 로마 가톨릭교회 추기경이자 재상인 [[마자랭]]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파리의 고등법원([[법복귀족]](法服貴族))이 칙령의 등록을 거부함으로써 왕권에 반항하여 왕실도 한때는 피난하여 파리를 퇴각하였으나, 왕당파의 콩데 공(公)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콩데 공은 마자랭과의 반목으로 체포되었고 지방에서는 반왕당파 귀족이 동맹하여 반항하였으므로 왕실과 마자랭은 다시금 파리를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