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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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자식은 없었고 양자로써 이복동생인 [[모리 히데카네]](모토나리의 9남)와, [[기노시타 이에사다]](木下家定)의 5남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양자인 하시바 히데토시(羽柴秀俊;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를 맞아들였다.
* 관례를 올리기 전에 [[고바야카와 씨|고바야카와가]]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이름엔는 모리 가문의 돌림자인 「元」가 들어있지 않으며,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에게서 따온 돌림자인 「隆」와 고바야카와가 돌림자인 「景」로 이름을 지었다. [[깃카와 씨|깃카와가]]에 들어간 친형 모토하루와는 대조적으로 평생 한 번도 「모리 다카카게」란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다.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당시는 기노시타 히데토시)는 친자식이 없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로서 양육되고 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에게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히데요리]]가 태어남에 따라 히데아키의 처우를 고민하게 된 히데요시는 히데아키를 모리 씨의 양자로 내보내려 획책한다. 다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진의를 알아차리고, 본가의 후계자를 다른 집안에서 온 양자가 잇는 것에 저항한다. 이에 다카카게는 히데요시의 책략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동생 [[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 [[모리 히데모토]]를 데루모토의 양자로 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친자식이 없는 점을 들어 히데요시에게 히데아키를 양자로 달라 간원하고 승낙받는다. 히데요시도 다카카게의 본심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리 가문을 생각하는 그 마음에 감동하여 히데아키의 입사에 의해 고바야카와 가 적장자에서 물러나게 된 [[고바야카와 히데카네]]를 독립시켜 다이묘로 발탁한다. 다카카게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 때 히데아키의 배반과 그의 요절로 인해 고바야카와 가문은 게이초 7년([[1602년]])에 단절되어 버리지만(다만 고바야카와란 이름은 히데카네의 아들 요시히사가 잇는다), 다카카게의 심모원려 덕분에 모리 가문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모토나리 사후 아직 당주로서의 자각이 부족했던 [[모리 데루모토]]에게 다카카게는 가신의 눈이 없는 곳에서 군신 관계가 아닌 숙부와 조카의 관계로 강경하게 간하는 것도 불사했다고 한다. 위대한 아버지・모토나리에게서 부탁받은 후계자를 가신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숙부로서도 보호자로서도 엄하게 길렀다고 한다. 후년 데루모토가 「정치는 전부 '''오바이인도노'''(黄梅院殿, 다카카게)에게 맡겼다」로 할 정도로, 데루모토에게 있어 다카카게는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였다.
*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 때 하시바 군 추격을 주장했던 모토하루의 의견을 누른 다카카게에게 고마워하여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히데요시의 다카카게에 대한 신임은 대단히 두터웠다. 히데요시는 도자마이며 게다가 바이신(陪臣, 가신의 가신)인 다카카게에게 이례적이라 할 만한 정도의 은상을 주었다. [[다이코켄치]](太閤検地)도 모리 씨의 영지에서만 면제해줬으며, 더하여 [[고다이로]](五大老)에 모리 씨를 2명이나 넣었다(다카카게, 데루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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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정권}}
 
{{Authority control}}
[[분류:1533년 태어남]]
[[분류:1597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