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네타카 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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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네타카 친왕'''(종존친왕, {{ja-y|宗尊親王|むねたかしんのう}})은, 일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6대 [[쇼군]](将軍)이다. [[고사가 천황]](後嵯峨天皇)의 제1황자로, [[황족]](皇族)으로서는 최초로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이 되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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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호조 씨(北条氏)에 의한 전제 체제가 정비된 막부에서 쇼군은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했고, 따라서 쇼군은 와카(和歌) 창작에 몰두하게 되어 와카 모임에 빈번하게 참석하였다. 결과 가마쿠라에서 무가(武家) 중심의 가단(歌壇)이 융성하게 되었고, 고토 모토마사(後藤基政), 시마즈 다다카게(島津忠景) 등 고케닌(御家人) 출신의 유능한 가인(歌人)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가마쿠라 가단은 《속고금화가집(續古今和歌集)》의 찬자를 뽑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고, 친왕 자신도 이 와카집에 가장 많이 입선된 가인이 되었다. 대표적인 와카집으로 《유엽화가집(柳葉和歌集)》, 《경옥화가집(瓊玉和歌集)》, 《초심우초(初心愚草)》가 있다.
 
친왕이 25세 되던 [[분에이]](文永) 3년([[1266년]]) 6월, 정실인 고노에 사이시(近衛宰子)와 중 료키(良基) 사이의 밀통 사건을 구실로 막부는 친왕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호조 마사무라(北条政村),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 등에 의해 소집된 요리아이쥬(寄合衆)에서 친왕의 쇼군직 해임과 교토 송환이 결정되었다. 이 소동으로 고케닌들이 가마쿠라로 대거 몰려들었고, 나고시류 호조씨(名越流北条氏)의 호조 노리토키(北条教時)가 단호히 반대하면서 도키무네의 제지도 뿌리치고 군세를 인솔해 무장시위를 벌이다 경솔함을 질책받기도 했다(노리토키의 행동은 훗날 '2월 소동'에서 그 자신이 숙청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차기 쇼군은 친왕의 사자(嗣子) [[고레야스 친왕|고레야스왕]](惟康王)이 맡게 되었다.
 
분에이 9년([[1272년]])의 '2월 소동'으로 친왕의 측근인 나카미카도 사네타카(中御門実隆)가 구속되고, 그 직후 아버지 고사가 천황이 붕어하면서 친왕은 출가하였다. 법명은 각혜(覚恵), 또는 행증(行証), 행승(行勝)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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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쇼군}}
 
{{Authority control}}
[[분류:1242년 태어남]]
[[분류:1274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