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흠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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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흠종'''(宋 欽宗, [[1100년]] - [[1161년]])은 [[북송]]의 제9대 황제(재위: [[1125년]] - [[1127년]])로 [[북송]]의 최후의 황제다. 정식시호는 공문순덕인효황제(恭文順德仁孝皇帝)이며 휘는 단(亶)이었다가 [[1102년]] [[2월]]에 훤(烜)이라고 고치고, 같은 해 12월에 환(桓)이라고 고쳤다. [[휘종]]의 장남이며, [[남송]]에서 즉위한 [[남송 고종]]의 맏형에 해당한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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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강의 변 ==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송나라의 관리들 사이에서 금나라에 대하고 강경론이 대두되게 되고, 배상금과 영토 분할을 거부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 송나라의 배신에 금나라는 다시 한번 개봉을 공격하고,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군에 의해 포로가 되고(정강의 변), [[1128년]] 에 한주(길림 성 리수현)을 거쳐 1130년에 동북의 흑룡강성 의난현으로 끌고 간다.
 
이때 남송의 재상 [[진회]](秦檜)도 같이 끌려가게 되는데, 이후 탈출하여 남송의 재상이 되었을 때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대책없는 강경론을 기피하는 계기가 된다.
 
== 최후 ==
[[1127년]], 흠종의 남동생 [[조구]]가 고종으로 즉위하여 [[남송]]을 세우고, 흠종은 복잡한 입장에 처해진다. 흠종의 남송 귀환이 인정되면, 고종은 제위 찬탈자가 되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역대 왕조 가운데에서도 특히 정윤론(正閏論)이 엄격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금나라의 측근들도 흠종 귀환을 계획했지만, 고종으로부터 억류 요청이 완곡하게 나오게 되었고, 결국 남송으로의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고종의 생모인 위 부인이 남송에 귀환했을 때에도 흠종은 위 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남송으로의 귀환을 고종에게 의뢰하도록 눈물로 탄원했다고 전해진다.
 
흠종은 그 후도 30년 이상에 걸쳐 동북에 계속 감금되었고, [[1161년]]에 오국성에서 61세로 병사했다. 그 후 흠종의 자손은 [[금 해릉왕|해릉양왕]]에 의해 살해되고, 대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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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포춘접(夫人 鮑春蝶)
 
=== 황자 ===
* 장남 : 황태자 조심(趙諶, [[1117년]] ~ ?) - 인회황후 소생.
* 차남 : 조근(趙謹, [[1127년]] ~ ?) - 신덕비 주씨 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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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송 왕조}}
 
{{Authority control}}
{{기본정렬:흠종, 북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