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영어 위키백과 참고하여 {{Authority control}} 추가
44번째 줄:
조비는 [[220년]] 정월 조조의 죽음으로 위왕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조조의 지위를 승계한 그 해에, 결국 [[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수도를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후한 헌제|헌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넘겨받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후한 헌제|헌제(민제)]]가 스스로 양위를 주도한 게 아니라 조비가 선양이라는 평화로운 형식적 절차를 통해 한나라 4백년 사직을 찬탈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리하여 조비는 황제로 즉위하고, 헌제는 산양공에 봉해져 하내군 산양현 1만 호를 받았으나, 한때는 주살되었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는데, [[촉한]]에서는 이 소문을 [[유비]](劉備)가 황제로 즉위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 이후 조비는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정책을 쓰는 한편, 냉혹한 인사를 단행했다. 우선 가난한 백성을 위해 자신이 많은 재산을 기부한다. 그 영향을 받아 조비를 섬기고 있는 고위 관직층의 신료도, 가난한 백성을 위해 구제 활동을 한다. 그 결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조비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관우]](關羽)에게 항복했던 [[우금 (문칙)|우금]](于禁)이 돌아오자 선친인 [[조조]]의 무덤지기로 임명했다. 조조의 묘지 담벼락에는 희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다름 아닌 관우가 [[방덕]](龐德)과 우금을 생포해 놓은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방덕은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 관우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관우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지만, 우금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비굴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울면서 관우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우금은 분통이 터져 죽었다. [[조창 (조위)|조창]](曹彰)의 경우 역시 병력을 남김없이 몰수하고 내쫓아버렸다.
 
조비는 대외적으로는 순종의 뜻을 밝힌 [[손권]](孫權)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오왕으로 책봉했으나, 손권이 태자를 인질로 바치기를 거절하자 대군을 동원해 2차례에 걸쳐 손권을 공격하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내치 면에서는 유학을 장려하며 도덕성의 향상을 기치로 삼았으나 스스로는 이와 반하는 패륜적 행위를 거듭 자행했으며, 결과적으로도 지도 계급의 도덕성 향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또한 즉위 직후에 시행했던 [[구품중정제|구품관인법]]의 제정은 사대부 계층의 문벌 귀족화를 초래해 수많은 폐단을 낳았다.
55번째 줄:
조비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공행상을 폈지만, 과거에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자는 육친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후계 경쟁의 쟁탈자였던 [[조식 (조위)|조식]]의 측근들은 조비의 즉위 직후 삼족이 몰살되었으며, 조식은 모친 변 태후의 만류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졌지만, 그 후 지방으로 쫓겨나 철저한 감시 속에서 다시는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몇 번이나 영지를 옮기면서 쓸쓸히 죽었다. 또 다른 동생인 [[조창 (조위)|조창]]도 비슷하게 취급되었는데,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조비에 의한 독살설조차 제기할 정도였다.
 
일찍이 조비는 당숙뻘인 [[조홍 (조위)|조홍]](曹洪)에게서 무리하게 재물을 빌리려고 했지만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이후 조비는 그 때문에 조홍에게 원한을 품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조홍을 내쫓고 조홍의 식객이 범한 죄를 이유로 처형하려고 했다. 이것도 변 태후의 사주를 받은 곽 황후의 처절한 만류로 죽음만은 면했다. 이밖에도 과거의 원한으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신하들을 처형한 일이 많으며, [[조강지처]]이던 견 황후에게는 질투가 심하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는 등 치졸한 면이 많이 보인다.
 
또한 조비는 인재를 보는 안목 역시 매우 좋지 않았는데, [[맹달]]은 촉나라에서 [[관우]]의 죽음에 연루되어 위나라로 도피해서 귀순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용태수에 임명하는 등 매우 극진히 대우했으며, [[정의 (조위)|정의]]는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청하공주]]와 결혼하지 못하게 막았다. 전술한 견 황후에게 자결을 명한 것은 대외적으로는 질투가 심하다는 혐의지만, 실제로는 늙어서 미모가 떨어졌기 때문에 자결을 명한 것이다. 따라서 조비는 사람의 외모로 그 됨됨이를 판단할 정도로 매우 치졸했다.
83번째 줄:
** 5남 : 동해정왕 조임(東海定王 曹霖)
* 후궁 : 서희(徐姬)
** 6남 : 양애왕 조애(梁哀王 曹哀)
* 후궁 : 소희(蘇姬)
** 7남 : 한단회왕 조옹(邯鄲懷王 曹邕)
132번째 줄:
{{중국 삼국 시대의 황제}}
{{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
{{Authority control}}
[[분류:187년 태어남]]
[[분류:226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