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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메이지]] 원년)에 첫 출진을 하였고, 하사관으로 [[하코다테 전투]](箱館戦争)에 참전한 후에 육군에 입대하였다. [[1874년]](메이지 7년) [[사가의 난]](佐賀の乱)에 대위로 참전하여 부상을 당하였다.
 
[[1876년]](메이지 9년)에 구마모토 진대의 준참모로 [[신푸렌의 난]](神風連の乱)을 진압하였고, 같은 진대의 참모부장(소좌)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여 [[구마모토 성]] 농성전에 참가하였다. 진대 사령장관 [[다니 다데키]](谷干城) 소장을 보좌하여 사츠마 군의 공격으로부터 구마모토 성을 사수하였다.
 
[[1898년]]부터 [[1906년]]까지 [[타이완 총독]]으로 재직 당시 [[청일 전쟁]] 종료 후에 방역 사무로 재능을 보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를 타이완 총독부 민정국장(민정장관으로 개칭)으로 임명하여 전면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통치를 위임하였다. 고토는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저항을 철저하게 진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건한 처우의 정책을 행하여 일본이 [[타이완]]을 장악하는데 일조하였다.
 
[[러일 전쟁]]의 개전 전에 [[타이완 총독]]인 채로 내무대신을 겸임하고 있었지만 [[1903년]](메이지 36년)에 대러시아전 계획을 입안하고 있던 참모차장 [[다무라 이요조]](田村怡与造)가 급사하면서 참모총장 [[오야마 이와오]](大山巌)의 특별한 청으로 내무대신에서 사임하고 다무라의 후임을 맡았다. 타이완 총독의 직위를 유지하였고, 러일 전쟁을 위하여 새롭게 편성된 만주군 총참모장도 맡게 되었다. 만주군 총참모장으로 만주로 건너 간 이후 [[랴오양요동 전투]], [[사하 전투]], [[산데푸 전투]], [[봉천 전투]] 등에서 총사령 오야마 이와오 원수를 보좌하였다. 봉천 전투를 보고 받은 대본영이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진군을 통한 연해주의 점령을 계획하자 고다마는 급히 도쿄로 돌아와 전쟁의 종결을 진언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에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남만주철도]] 창립위원장도 겸임하였다. 위원장에 취임한 10일 후인 [[1906년]](메이지 39년) [[7월 23일]] 취침중에 뇌일혈로 급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