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HotCat을 사용해서 분류:사고 삭제함, 분류:1940년 10월 추가함
Nha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전쟁 정보
|분쟁 = 10·1 폭동사건
|전체 = [[한국의 군정기]]
|그림 = PIC1633.png
20번째 줄:
|기타 = 위 피해자 수치는 신고된 사람에 한한 것이기에 실제 피해 사상자는 이보다 훨씬 크다.
}}
'''대구 10·1 폭동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광역시|대구]]에서 발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일련의 운동을 지칭한다. 역사적 관점에 따라 10월 인민항쟁, 10월 항쟁, 10·1사건, 영남 소요, 10월 폭동 등으로 불린다.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10월 인민항쟁, 10월 항쟁으로,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영남 소요, 10월 폭동으로 부르며, 중립적인 입장에서는 10·1사태로 부른다. 자생적인 민중 항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10월 항쟁으로, [[조선공산당]]의 선동 및 주도를 주장하는 시각에서는 10월 폭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과거에는 10월 폭동, 영남 소요, 10월 항쟁의 용어가 혼용되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민중 항쟁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여 10월 항쟁이라는 용어가 통용되며, 공식적으로는 보다 중립적인 10·1사건이라는 지칭을 사용한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knun.net/news/article.html?no=5442
|제목=10월, 역사 뒤의 숨은 진실을 재조명하다
37번째 줄:
한편, [[1946년]] 5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군정에서 '공산당 활동 불법화'를 공표함과 동시에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는데 [[박헌영]]계열 [[조선공산당]]세력들에서는 "[[미군정]]에 대항하겠다."면서 '신전술'이라는 방식을 채택하여 더욱 급진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어 공산당과 [[전평]]은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의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렇게 되어 공산당과 전평은 [[9월 총파업]]을 주도해 나아가 본격적으로 미군정에 정면충돌을 벌였다.<ref>당시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비밀리에 월북, 해주에 있다가 소련을 방문하였다.</ref> [[9월 총파업]]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이에 대한 항거로 발전하게 되었다.<ref>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p379</ref>
 
== 대구지역의 폭동항쟁 ==
[[파일:1946년 10월 메이데이 행사.jpg|thumb|right|200px|사건 직전인 [[1946년]] [[10월 1일]] 낮에 개최된 메이데이 행사]]
[[조선공산당]]에서 주도하여 [[9월 총파업]]을 전개했을때, 대구에서는 [[전평]] 지도부에서 [[9월 23일]]부터 총파업에 돌입, [[10월 1일]]까지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다.<ref name="now1001">{{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