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54번째 줄:
* 1980년 서울대학교에서 신군부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 2009년 정년직후 경제사 중심의 뉴라이트 계열과 근현대사 역사연구자 등 양자를 공히 비판하고,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사료에 입각한 연구를 진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61818445&code=940100] 보수신문과 진보신문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만이 확대되어 보도되었다. 그러나 진보 논객이나 진보매체 기자들조차 <<조선일보>> 1면에 게재된 왜곡보도된 내용만 인용할 뿐, 정작 같은날과 다음날 <<한겨례신문>>, <<경향신문>>에 실린 뉴라이트 비판기사는 외면하였다. <<오마이뉴스>>에서는 <<조선일보>>를 바탕으로 비판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하였고, 진보매체 기자조차 자사 뉴스보다 보수매체를 신뢰하여 마치 뉴라이트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도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이 한국사회에서 과연 어느 정도인가를 극단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태진 교수를 야누스로 만들어버린 기사"[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osangwon89&logNo=100063401705]
* 2010년 5월 9일 일본내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한일양국 지식인 200여명의 이름으로 한일병합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일본정부의 과거역사 재인식과 사과를 요구하는 시국선언 등을 주도하였다. 최종 중국 지식인까지 가담하여 1,000여명이 서명하였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512002015] 강제병합 불법성이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서 인정되자, 국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는 조선총독부의일제의 강제동원 등에 대한 배상 관련 판결을 내렸다. 이전에 일본과 한국의 사법부는 3심까지 모두 강제동원은 합법이라는 판결을 하였다. [2009헌마182 태평양전쟁 전후 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에 관한 법률 제1조 위헌확인, 헌법재판소 선고일자 : 2011.12.29], [2009다22549 판결 손해배상기등 일제강제징용사건(공2012 1084), 대법원 선고일자 : 2012.05.12.]
* 뉴라이트 인사가 다수 참여한 정부 자문위원회에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대해서 비정상적으로 개입하여 역사학계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였다. 학계 원로학자이자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태진은 양측을 중재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양편으로부터 모두 편향된 시각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2011년 11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발표하면서 ‘이승만 독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친일파 청산 노력’ 등을 빼고,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자유민주주의’, ‘독재화’ 등 보수 세력의 입장을 대폭 반영시켜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ref name="정운현">정운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5113 독재미화, 위키피디아 보고 교과서 집필?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궤변론, 측은하다]. 오마이뉴스. 2011년 11월 14일.</ref> <ref>임지욱.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80628 MB정권의 '5.18 민주화운동 삭제'에 국민 격노]. 뷰스앤뉴스. 2011년 11월 14일.</ref> 이 때문에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면을 미화시켜 독재 정부에 대한 긍정사관을 세우고자 노력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ref name="정운현"/> 자신은 독재정권에 반대한다고 명백히 반박하였다.
* 2012년 10월 3일 새누리당에서 선대위 자문위원으로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으나 손숙 등과 함께 사실이 아님이 확인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030018255&code=91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