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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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 조약 이후 ===
{{참고|을사 보호 조약|한일합방}}
이후 [[대한제국]] [[군부 (대한제국)|군부]] 교육과장<ref>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새로 밝혀 쓰는 친일인물사》 (개마고원, 1999) 160페이지 </ref>을 거쳐 [[1906년]](광무 9년) [[1월]] [[일본]]국 사절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친왕]](伏見宮 若字博恭親王) 일행 파견에 대한 답례로 [[대한제국]]에서도 사절이 파견되자, 윤치성은 육군 정위(正尉)로 일본에 파견되는 대사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의 수행원의 한사람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2월]] [[일본]] 체류 중 기병[[참령]](騎兵參領)으로 승진하고, [[3월]] 말 귀국하였다. [[1906년]] [[7월]] 군부 참모국 제1과장이 되고, [[10월]] 군부 참모국 부국장이 되고, [[육군]] 기병[[부령]](騎兵副領) 흔3등에 임명되었다.
 
[[1907년]](광무 10년) [[4월]] 기자릉(箕子陵)의 석물(石物)과 정자각(丁字閣)을 개수하는데 감독관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6품에서 5품관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 다시 정삼품 [[통정대부]]로 승자하였다. [[1907년]] [[6월]]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배종무관]](陪從武官), [[9월]]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시종무관]](侍從武官)을 지냈고, 육군 [[기병]] 부장으로 승진했으며 뒤에 [[중장]]까지 승진했다. [[1907년]] [[김좌진]]. [[노백린]]이 상경하자 이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또한 그는 황실에 숨겨져 있던 금괴 8상자를 빼돌려 대한협회의 군자금으로 보내기도 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이 알려지자 일본 [[한국통감부|통감부]]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고종의 시종무관이었던 그는 경무총장 겸 조선주둔 일본군 헌병사령관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本次郞)에 의해 3개월간 감금, 고문당했다. 통감부에 감금당한 그에게 아카시는 고종의 밀명을 밝히라고 요구했지만 윤치성은 모른다로 일관하였다. [[10월]] 군부 군무국(軍務局) 예문과장(藝門課長)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 [[노백린]] 등과 함께 혁신피혁점(革新皮革店)을 개업하였다.<ref>동아일보 1926년 1월 24일자 2면, 사회면</ref> [[1909년]] 기병 부장(騎兵副將)으로 있다가 기병 중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