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육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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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옥천 육씨(沃川陸氏)의 시조(始祖) 육보(陸普)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 [[당나라|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宣敎師)로 보낼 때 홍은열(洪殷說)·정한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신라에 동래(東來)하여 뛰어난 공적을 쌓아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가 되었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관성(管城)은 [[충청북도]] [[옥천군]]의 옛 지명이다.
 
그러나 중간 계대(繼代)를 실전(失傳)하여 고려 충렬왕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육인단(陸仁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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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단(陸仁端)의 손자 육거원(陸巨遠)의 아들 대에서 덕곡공파(德谷公派)·목사공파(牧使公派)·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낭장공파(郎將公派)로 분파되었다. 맏아들 육려(陸麗)는 덕곡공파(德谷公派), 둘째 육항(陸沆)은 공주목사공파(公州牧使公派), 셋째 육비(陸埤)는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넷째 육수(陸綬)는 낭장공파(郎將公派)로 크게 갈라졌고, 막내인 육태귀(陸台貴)는 손자대에서 후손이 끊겼다.
 
* 덕곡공파(德谷公派) - 육명산, 육금산, 육지육려(陸麗)
* 목사공파(牧使公派) - 육저, 육예, 육연, 육하, 육견육항(陸沆)
*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 육지, 육헌, 육윤육비(陸埤)
* 낭장공파(郎將公派) - 육축, 육자관, 육자홍육수(陸綬)
 
== 인물 ==
덕곡공파(德谷公派)의 육려(陸麗)는 고려 말에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왜적(倭賊)을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워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충남 공주 덕리(德里)에 은거(隱居)하였다. 그의 손자(孫子) 육명산(陸命山)은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으며 후대에 내려가 다시 석동계(石同系)와 석정계(石貞系)로 나누어져 조선조(朝鮮朝)에서 충의(忠義)의 전통을 이었다.
* 육거원 : 고려 중랑장
 
* 육홍(鴻) : 육려의 아들. 고려 말에 부마가 되었다.
목사공파(牧使公派) 육항(陸沆)의 맏아들 진(晉)의 후손에서 부위(副尉)를 지낸 육저(渚)와 제주목사(濟州牧使) 육한(陸閑), 동래현감(東來縣監) 육세영(陸世英),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 유학자 육상지(陸相贄) 등이 있고, 둘째 상(常)의 후손으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육춘수(陸春秀), 만호(萬戶) 육석(陸碩)과 선조(宣祖)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육성우(陸成禹) 등이 있다.
* 육명산(陸命山) : 육홍의 손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으며 후대에 내려가 다시 석동계(石同系)와 석정계(石貞系)로 나누어져 조선조(朝鮮朝)에서 충의(忠義)의 전통을 이었다.
 
* 육애(陸涯) :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비의 아들. 참판(參判)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는 육비(陸埤)의 아들 애(涯)가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두 아들 부사 육지와 참봉(參奉) 육헌(陸軒)의 대(代)에서 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
* 육헌(陸軒) : 육애의 아들. 참봉(參奉)
 
낭장공파(郎將公派)는 조선 명종(明宗) 때 장사랑(將士郞)을 지낸 육한종(陸漢宗)과 선조(宣祖)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역임한 육붕(陸鵬)이 대표적이며, 숙종(肅宗) 때 학자 육홍(陸鴻)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저서(著書)로 「석정유고(石亭遺稿)」를 남겼다.
 
* [[육대춘]](陸大春)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건중(建中). [[조선 명종]] 1년(1546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첨정(僉正),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 육한종(陸漢宗) :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士郞)
* 육붕(陸鵬) : 조선 선조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 육성우(陸成禹) : 조선 선조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 육저(陸渚) : 목사공파(牧使公派) 항(沆)의 맏아들 진(晉)의 후손으로 부위(副尉)를 역임했다.
* 육한(陸閑) : 제주목사(濟州牧使)
* 육세영(陸世英) : 동래현감(東來縣監)
* 육홍(陸鴻) : 숙종 때 학자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렸다.
* 육상지(陸相贄) : 조선 정조 때 유학자
* 육춘수(陸春秀) : 상(常)의 후손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 육석(陸碩) : 만호(萬戶)를 역임했다.
* [[육용정]](陸用鼎, 1843년~1917년) : 조선 말기 유학자. 호는 의전(宜田)이다.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대대로 세거한 충청북도 옥천군(청산현) 출신이다. 아버지 육병규(陸炳奎, 1811∼1849)와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호성리학(畿湖性理學)의 거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아들 육종윤(陸鍾允)이 제중원주사(濟衆院主事)의 직위에 오르면서 육용정은 서오릉(西五陵)의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그 해 갑오농민운동이 발발하면서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육종윤이 아관파천 당시 유길준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그도 관직 생활을 그만두었다. 이후에는 은거하면서 당대 지식인이었던 김택영(金澤榮: 1850∼1927)‧김윤식(金允植: 1835∼1922) 등과 교유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유고 『의전기술(宜田記述)』은 사론(士論)‧군신론(君臣論)‧경세론(經世論)‧심성론(心性論)‧서양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매우 짜임새 있는 책이다. 1912년에는 그간 저술되었던 『의전문고(宜田文稿)』, 『의전시고(宜田詩稿)』, 『의전속고(宜田續稿)』, 『의전기술』 등을 모아서 『의전합고(宜田合稿)』를 출판하였다.
* [[육홍균]](陸洪均, 1900년 ~ 1983년) : 독립운동가. 제헌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