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산 (승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Parkasol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Parkasol (토론 | 기여)
24번째 줄: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받던 포산은 해방 후 결혼을 하며 환속했다. 포산이 환속하자 그의 사형, 사제들 및 제자들 중에는 그와 절교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포산은 환속했지만 그의 명성은 유명해서 여러 스님들이 변치 않고 찾아왔다. 포산을 [[불교]]로 인도한 청담 스님은 자주 찾아와서 예전처럼 친분을 나누었다.<ref name="ppp43">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3</ref> 그러나 그가 환속한 후에도 일부 상좌 스님들은 그를 시봉하였고, 환속인가 대처승인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해방 이후 그는 [[돈암장]]과 [[이화장]]에도 출입했다. 숙부 윤치영이 초대 내무부 장관에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밀접하여 위세가 대단했다. 1921년부터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수시로 이승만과 밀접하게 접촉하던 윤치영은 이승만의 비서실장과 내무부장관, 주프랑스 대사 등을 역임한다.
 
[[윤치영]]이 [[이승만]]의 비서실장 시절 이승만에게 산중에서 생활하는 조카가 있는데 범상치 않다며 슬쩍 면담을 권했다.<ref name="ppp44">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4</ref> 그러나 [[이승만]]과의 면담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에나 성사된다.
 
그렇게 해서 그는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다. 포산은 [[이승만]]을 만나는 자리에 주머니가 큰 [[조끼]]를 입고 갔다. [[이승만]]은 젊은이가 무슨 큰 조끼를 입고 있느냐고 하자 포산은 자신의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이 주머니에 역대 조사와 삼세제불을 다 집어 넣고 한 주머니에는 천하 영웅을 넣었는데 각하도, 백범도 다 내 주머니 속에 있습니다."라고 일갈한다. 그러자 [[이승만]]의 표정은 굳어버렸다.
 
[[이승만]]과 헤어지고 나오면서 포산은 "아이구 [[이승만]]도 안되겠다."며 실망했다고 한다.<ref name="ppp45"> 박부영, 원철, 김성우, 석영당 제선선사 (비움과소통, 2011) 45</ref> 이에 그의 숙부 [[윤치영]]은 대경실색하였다 한다.
 
=== 생애 후반 ===
청담은 포산이 한참 나이가 아래 연배이고, 출가도 늦었지만 깎듯이 대했고, 퇴속 후에도 변치 않았다.<ref name="ppp43"/> 포산이 항상 일어나서 맞이하며 깎듯이 대하고 어려워했던 이도 청담이었다. 가장 많이 찾아온 스님은 운허 스님이었고, 한 스님은 포산이 환속하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효봉 스님도 청담 스님등과 같이 포산을 찾아왔는데, 퇴속 후에도 떠나지 않고 시봉하던 도일 스님은 포산의 병 간호를 하며 시봉했다. 효봉, 청담은 [[이승만]]이 종단 정화를 하는데 도일이 꼭 필요하다고 하자, 그는 상좌를 서울로 보내는 데 동의한다.<ref name="ppp43"/> 이로 미루어 볼 때 "포산은 자신은 퇴속했지만 정화를 적극 지지했었던 것으로 보인다.<ref name="ppp43"/>"는 평가도 있다.